감성밥상으로의 초대
감성밥상으로의 초대
  • 이영숙<시인>
  • 승인 2016.02.28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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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이영숙

“선생님, 내일 우리 집으로 점심 드시러 오실래요? 맛있는 우동 한 그릇 말아 드릴게요.”

집으로 식사하러 오라는 그 말이 너무 생경해서 여러 번 문자를 확인했다. 돈독한 사이도 아니고 단지 몇 해 전 인문학 강좌에서 잠깐 인연을 맺은 정도의 안면이기 때문이다.

오후부터 방과 후 수업을 시작하는 터라 될 수 있는 대로 약속을 하지 않는 데 어렵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오후 사정을 고려하여 이른 점심을 제의했다.

이튿날, 치즈 케이크 하나 간단히 들고 찾아간 집, 반쯤 열어둔 현관문을 빠끔히 열고 들어가니 거실 중앙에 긴 식탁이 놓여 있다. 잔잔한 들꽃이 디스플레이 된 사이사이로 예술 작품처럼 정갈한 음식들이 즐비하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알프스 소녀 하이디처럼 하얀 에이프런과 머릿수건을 두른 채 달려나와 반갑게 맞는다.

구리 료헤이의 장편 ‘우동 한 그릇’을 떠올리며 부담 없이 들어섰는데 럭셔리한 테이블에 메인 같은 애피타이저가 황금밥상을 이룬다. 공간 이동하여 영화 장면으로 들어온 듯한 황홀경에 그만 현관에서 부동 상태로 서 있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그녀만의 식탁, 직접 텃밭에 재배한 유기농 음식재료들로 만든 상차림이다. 잔잔한 꽃잎과 양송이로 만든 샐러드, 꽃 모양 김밥, 단 호박 조림, 직접 구운 통밀 빵과 소스, 맑은 조개탕, 오랜 시간 육수를 우려 만든 시원한 우동….

잘 꾸며진 상차림을 흩뜨릴 수 없어 수저로 헤젓기 힘들었지만 모든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면서 참살로 변하는 느낌이다. 연방 탄성을 자아내며 천상 정원에서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 상차림을 위해 그녀가 오랜 시간 정성을 쏟았을 그 노고에 경의를 표하여 그 테이블의 이름을 감성 밥상이라 지었다. 시간에 쫓겨 졸 시집 한 권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아쉽지만 자리를 빠져나왔다.

살면서 손님을 집으로 초대한 일이 몇 번이나 있던가. 고작 ‘차 한 잔’하자는 말이나 밖에서 식사 접대가 전부이다. 음식점의 기계적인 상차림은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늘 허기지고 배가 고프다. 상업적인 거래가 오간 음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돌잔치나 생일잔치도 집을 나와 음식점으로 이동하였다. ‘식당 음식은 먹을 건 많아도 먹은 것 같지 않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우거지만 넣고 설렁설렁 만든 고향 집 어머니표 된장찌개가 그토록 맛있는 것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라는 재료가 듬뿍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 방송사마다 집밥 열풍이 한창이다. 집밥의 의미는 밥이라는 단순함에서 벗어나 정서적인 교감을 내포한다. 간단하지만 정으로 뜸들이고 감성으로 세팅한 밥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그토록 많은 음식을 장만하고도 간단히 ‘우동 한 그릇’ 먹자고 했을까. 우동 한 그릇이라는 서민적인 음식으로 초대받는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과 집밥이라는 편안함을 주고자 한 배려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집으로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전설처럼 돼버렸다.

‘손님이 오지 않는 집에는 천사도 오지 않는다.’ 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속담이 있다. 경제적인 효용성으로 손익을 산출하지만 그 어떤 산해진미도 정이 녹아있는 집밥, 그 맛을 우려낼 수는 없다.

조만간 번개 콩나물밥이라도 지어서 감성밥상 집밥 릴레이를 이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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