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 정국
필리버스터 정국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6.02.28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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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이수안

포도나무 전지작업을 한다. 가지의 굵기와 겨울눈의 방향 등을 고려해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선택한다.

삼십 여년 일해 오면서 익숙해져 판단도 가위질도 별 고민 없이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틀 전에 마친 복숭아나무 전지 작업은 이와 반대였다. 수형, 성격 등이 포도나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행히 복숭아나무는 어지간히도 무던한 성격이다. 그 무던함을 믿고 복숭아농사 초보인 내가 더듬더듬 전지작업을 직접 했다.

수형과 나무의 성격만 다른 것이 아니다. 과실의 모양과 맛도 천양지차로 다르다.

성숙한 여인을 연상시키는 낭만적인 외관에 새콤달콤한 맛이 포도의 특징이라면, 아기 엉덩이를 연상시키는 모양의 복숭아는 풍부한 과즙과 향이 일품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나무는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제 개성대로 성장하고 열매 맺는 본연의 역할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

혼자 일할 때 나는 라디오를 옆구리에 차고 밭에 들어간다.

주로 음악을 듣지만 요 며칠은 국회에서 진행되는 <무제한 토론>을 계속 듣고 있다. 국회의장이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하자 야당이 <필리버스터 정국>으로 대응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자주 봐서 굳어버린 국회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

서로 고함치는 것은 보통이요, 마이크와 의사봉을 차지하기 위해 삿대질과 멱살잡이하며 몸싸움도 서슴지 않던 광경…. 국민이 정치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은 그 모습에 피로감이 쌓인 탓도 있지 싶다.

이 토론은 그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명징하고 신선하다. 어떤 의원은 명쾌하게, 어떤 의원은 차분하게, 어떤 의원은 논리정연하게, 또 어떤 의원은 휠체어에 앉아서, 또 눈물을 닦으면서…. 유연하지만 단호한 이 토론을 직접 보기 위해 방청석을 가득 메운 시민들도 내 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데 많은 의원을 비롯해 어젯밤 진선미 의원까지 100시간을 훌쩍 넘기면서 이어가는 이 토론은 대체 왜 하게 된 걸까.

알다시피 이 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한 국정원의 질주를 막자는 데에 있다.

국정원이 국내 정치에 관여하는 것과, 영장 없이도 민간인을 사찰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국내 치안은 검·경이 하면 될 것이다. 국정원은 대북정보, 대테러, 국제범죄, 국가보안 등의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면 된다.

검·경의 일을 하겠다는 것은, 마치 포도나무가 복숭아를 달겠다는 것처럼 괴이한 일이다. 검·경이 할 일은 검·경이 하고, 국정원이 할 일은 국정원이 하고, 저마다 맡은 일에만 충실하다면 이런 토론이 왜 필요하겠는가.

포도나무는 포도를 다는 일에만 열중한다. 결코 사과를 달거나 복숭아를 다는 일이 없다. 복숭아나무도 열매로 복숭아만 단다. 죽으면 죽었지 사과·배나 포도송이를 다는 일이 없다. 복숭아나무가 할 일을 포도나무가 해버리거나, 포도나무가 할 일을 복숭아나무가 해버린다면 세상이 얼마나 뒤숭숭하겠는가.

일개 촌부가 생각해도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 이치를 높으신 양반들은 진정 모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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