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은 ‘양패구상’을 피하는데
미·중은 ‘양패구상’을 피하는데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6.02.28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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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유방과 연대해 진(秦)나라를 공략하던 항우에게는 유능한 책사 범증(范增)이 있었다. 범증은 항우보다 먼저 진나라 수도 함양을 접수한 유방의 비범함을 꿰뚫었다. 항우에게 유방을 쳐서 후환을 없애라고 진언한다. 전력에서 압도적 열세인 유방은 급히 항우의 막사인 홍문(鴻門)을 찾아와 목숨을 구걸한다. 스무살이나 어린 자신을 형님으로 부르며 납작 업드린 유방을 본 항우는 경계를 풀고 주연을 마련한다. 유명한 ‘홍문의 잔캄가 벌어진 것이다. 낙담한 범증은 항우의 조카인 항장(項莊)을 불러 계책을 알린다. 항장은 잔치의 흥을 돋우겠다며 항우에게 청해 칼춤을 추면서 유방을 처치할 기회를 노린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한반도 사드 배치와 관련해 했던 말, ‘항장무검, 의재패공(項莊舞劍, 意在沛公)’은 이 대목서 비롯됐다. ‘항장이 칼춤을 춘 진정한 의도는 유방(패공)에 있다’는 뜻이다. 미국이 사드 배치의 구실로 북한 미사일을 언급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을 겨냥한 것 아니냐는 항변이다. 우리에게 그의 말은 또 다른 시각에서 논란이 됐다. 미국은 항우, 중국은 유방, 한국은 주군의 하명을 받고 칼춤을 추는 항장에 불과하다는 뉘앙스가 진하게 묻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외교부는 “우리는 항장이 아니다”고 맞받았지만 최근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런 반박이 무색해진다. 지난 23일 미국은 사드 배치를 논의할 한·미 공동실무단 약정 체결을 돌연 연기했다. 발표를 불과 1시간여 앞두고서다. 이틀 후 미국은 중국과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에 합의했다. 다음 날 해리 해리스 미국 태평양사령관은 “한국과 미국이 사드 배치를 협의하기로 했다고 해서 반드시 배치하는 것은 아니다”며 슬쩍 발을 뺐다. “북한의 위협에서 자국민과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며 사드 배치 필요성을 강조했던 존 케리 미 국무장관도 “사드 배치에 급급하지 않는다”고 물러섰다. 미국이 사드를 대북 제재에 중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삼은 것 아니냐는 추정까지 나왔다. 사드가 국가안보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중국과 날을 세웠던 우리로서는 황망한 입장이 됐다.

미국이 지난달 북한의 4차 핵실험이 있기 수일 전 북한과 은밀히 만나 평화협정 문제를 논의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비핵화 없이는 대화도 없다’는 대북 원칙을 고수해온 미 행정부가 뒤에서는 딴짓을 했지만 우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항장에 비유된 우리의 외교적 위상이 재차 드러난 순간이었다.

유방의 장수 번쾌가 목숨이 경각에 달해있던 주군을 주연에서 빼내 황급히 군막을 빠져나오다 항우의 참모 진평과 부닥친다. 진평이 소리 질러 군사를 부르려 하자 번쾌가 분연히 내뱉은 말이 ‘양패구상 동귀어진(兩敗俱傷 同歸於盡)’이다. 양쪽 모두 패해 함께 다치고 같이 끝장을 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군사를 부르면 우리도 당하지만 그 전에 당신도 내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이자 제안이었던 것이다. 진평은 공명심 대신 목숨을 택했고 유방은 탈출에 성공해 훗날 항우를 제압한다.

미·중은 번쾌와 진평처럼 ‘양패구상’을 피하고 공생의 길을 가기로 한 모양이다. 미국만 철석같이 믿고 초장부터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배치 등 카드란 카드는 모두 빼들며 배수진을 쳤던 우리와는 달랐던 것이다. 미국은 요지부동이던 중국을 대북 제재에 동참시켜 실리를 챙기고, 중국은 사드 사태에서 미국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체면을 살린 모양새다. 그러나 우리가 얻게 될 것은 역대 최고라고 자평했던 중국과의 관계가 엉망이 되고 국내외적으로 체면이 깎이는 불이익 뿐일지 모른다. 우리 외교장관이 노래했던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동시에 러브콜을 받는 축복’은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우리의 외교적 입지를 냉정하게 재인식해야 할 때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우방의 안보조차도 서슴없이 협상 도구로 삼는 매몰찬 외교를 미국에게 배워야 한다. 이런 뼈아픈 자기성찰을 겪어야 강대국이 각축하는 동북아에서 살아남을 외교 전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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