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러름의 방향 전환 시대
우러름의 방향 전환 시대
  • 김태종<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6.02.25 2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時 論
▲ 김태종<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이따금 붓을 들고 쓰고 싶은 글씨 중에 敬(경)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마음은 이 글자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써도 짜임새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예전에 어떤 이가 ‘나는 學(학)이라는 글자가 좋은데 어떻게 써 놓아도 모양이 마음에 안 든다’면서 자기는 아무래도 배우는 것에는 일생 서툰 사람인가 보라고 한 말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러름’이라는 뜻을 지닌 이 글자가 그렇게 서툴고 어색하기만 한 걸 느낄 때마다 우러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거듭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러름은 위를 지향합니다. 낱말의 뿌리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위를 바라본다는 것이 이 말의 기본적인 뜻일 터, 좀 더 풀어서 말하면 바라보는 이가 자신은 낮추고 상대방은 높이는 마음가짐을 그렇게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전통사회에서 평민들이 지위나 권력을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로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이때 우러름을 받는 이가 지위나 권력은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 됨됨이가 갖춰지지 않았을 때에는 우러름이라는 말이 ‘횡포를 무릅씀’이라는 말과 같은 뜻일 수도 있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지위나 권력 앞에서 나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힘을 가진 자들이 횡포를 부리면 힘이 없다는 말은 슬프다는 말과 다르지 않고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피면 언제나 힘이 있는 이들은 그 숫자가 적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노자는 高以下爲基(고이하위기)요 貴以踐爲本(귀이천위본)이라고 하면서 낮은 자리에 있는 것, 또는 흔한 것들의 높은 자리나 귀한 것들을 지탱하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노자의 이야기가 소중한 가르침으로 귀에 와 닿는 것은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의 반증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당연하게 지켜지는 세상이라면 그런 가르침은 나올 필요도 없을 것이고, 설령 나왔다 하더라도 어리석은 이의 잠꼬대거나, 주정뱅이의 술타령 아니리 정도에 지나지 않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민주주의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나돌기 시작한 지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시민은 시민대로 민주적 가치관과 인식이 자리 잡았을 때에만 가능한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제도보다 됨됨이가 앞선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우러름의 방향이 아래에서 위라고 해야 정상적이라는 생각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곳곳에서 확인할 때마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시대를 사는 것이 아니라, 전통사회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과도기를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헌법이 분명하게 말한 사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겁니다. 이것만으로도 기본적인 틀은 갖춰져 있는 셈입니다. 이제 민주적인 가치관을 확립하고, 민주적 인식을 갖춰가는 일이 남았습니다. 낡은 권위주의의 청산, 아래에 있는 이들은 서로 사랑하고, 위에 있다는 이들은 아래에 있는 이들의 소중함과 그들이 자신들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라는 생각에서 아래를 우러르는 세상이 될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러니까 우러름의 방향이 아래에서 위였던 시대가 끝나고, 위에서 아래를 우러르는 시대가 열렸으니, 이것을 받아들임이 바로 민주주의 시작이 아니겠는지요? 날마다 좋은 날!!! - 풀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