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읍성과 성안
청주읍성과 성안
  • 한현구<청주시 상당구 관리팀장>
  • 승인 2016.02.2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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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한현구<청주시 상당구 관리팀장>

사라진 청주읍성, 남겨진 성안길. 청주시의 한복판에 자리한 청주읍성은 전설이 되어버린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전지이다. 조선이 문이 닫기 전까지 빛나는 성곽이었다. 성안길은 청주읍성을 관통하는 길로 해방 후에 화려한 상점가로 거듭났다. 이 길은 일제치하에서 본정통(本町通)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이 명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지금 불리는 성안길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읍성의 전신은 통일신라의 신문왕 때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축조연대를 문헌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성에 속한다. 읍성 내에는 고려 초의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鐵幢竿)이 자리하고 있는바 그때 이미 이곳이 지방행정의 중심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조선시대 효종 때인 1651년에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주둔지인 병영을 해미로부터 청주로 옮겨 읍성은 병영성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지역과 국가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청주읍성은 나라의 명운과 그 맥락을 같이하였다. 경술국치 후 일제는 1911년 4월 착공하여 1915년에 마친 시가지 정비 사업을 명분으로 하여 읍성 사방의 성벽을 헐어 그 돌을 이용하여 하수구를 만들고 남석교에서 일직선으로 남문을 경유하여 북문으로 통하는 간선도로 즉 성안길(중앙로)을 개수하였다.

일제가 청주읍성을 서둘러 파괴한 것은 상당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해에 왜군이 점령하였다가 육전에서 최초로 의병 및 승병 등에 의하여 탈환된 청주읍성을 잊지 않고 있다가, 국운이 기운 조선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게 되자 과거의 치욕을 지우고자 전국에 산재한 읍성과 함께 청주읍성을 흔적도 없이 허문 것이다. 일제의 이와 같은 행태는 1592년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의 민관군에게 대패한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왜군은 그 이듬해 상당한 군사적 피해를 보며 진주성을 재침하였는데 성을 함락시킨 후 사람은 물론 가축에 이르기까지 도살하는 잔인한 만행을 저지른 바 있다. 전란 당시 청주읍성이나 진주성 등에서 쓰라림을 겪은 후 우리나라 성곽에 대하여 일본이 일종의 트라우마를 갖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성내에 있는 성안길은 해방 후 근대화·산업화 시절에 청주의 핵심 상권 자리로 발돋움했다. 성안길은 이후 고속 성장하여 1970~80년대에는 서울의 명동거리, 대구의 동성로거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거리라는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는 ‘패션의 거리’로 그 이름을 떨쳤다. 2000년대 들어서 청주 외곽이 발달하면서 성안길은 심각한 공동화 현상을 겪기 시작했다. 지금은 화려했던 상권이 크게 위축된 상태로 상인들과 주민들이 청주시와 함께 과거의 영화를 되찾고자 목하 고심하면서 각별히 노력하는 중이다.

현재 우리 고장 청주에서는 지역의 대표적인 산성인 상당산성의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와 더불어 평지에 자리하였던 청주읍성에 대하여 장기적인 사업으로 고증을 거쳐 원형에 근접한 복원을 추진함은 어떨까 싶다. 장차 읍성이 전체적으로 복원된다면 문화시민의 긍지를 높이고 청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함은 물론 관광자원으로 거듭나 성안길의 옛 영화를 되찾는데도 큰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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