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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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6.02.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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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아름다운 그대여. 떠난 지 오래된 이곳을 찾아준다면 나는 그대를 위해 이렇게 하리다.

먼저, 맛있는 것을 사주겠소.

칼국수라면 그대의 옛집 근처에 있는 사골 칼국수면 어떻소? 따뜻한 국물 한 사발이면 마음도 넉넉해진다오. 고기 국물이 텁텁하다면 김치만두를 넣어주는 칼국수를 먹읍시다. 면이 참 꼬들꼬들하다오. 만두피가 씹히는 맛이 제법이라오. 충분히 국물 맛이 배인 국수를 원한다면 어른들이 말하는 ‘누른 국’을 먹읍시다. 김치를 넣고 촌스럽기 그지없이 끓인 국숫집도 안다오.

오래된 우동집도 가봅시다. 이제는 경치 좋은 곳에도 가게를 열어 시내를 시원하게 바라보면서 우동을 먹을 수도 있답니다. 옛날 맛에서 변치 않은 까닭은 여전히 그 집 며느리가 주방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뻘건 얼굴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라오. 새 메뉴를 원하면 그 면으로 만든 짬뽕은 어떻소? 나도 아직 먹어보진 못했지만.

메밀국수 집은 어떻소? 제과점이 이제는 아예 메밀 집으로 바뀌었다오.

다른 곳도 잘한다고는 하지만 시원한 장국으로 치자면 이 집이 가장 깔끔하다오. 겨울이라면 뜨거운 메밀국수도 좋소. 온면도 나름의 정취가 있지요.

그것도 싫다면 메밀짜장을 드시오. 감자를 숭숭 썰어 넣은 고기 없는 짜장이오. 아예 세 그릇을 시킵시다. 찬 메밀, 더운 메밀, 그리고 짜장 메밀을.

그리고는 걸으려 하오. 봄이면 벚꽃 길을 걸읍시다. 무심천변 길도 좋지만 호젓하려면 산성이라도 올라가서 벚나무를 누려봅시다. 그곳 성곽에서는 벚나무를 아래로 볼 수 있어서 좋소. 아래서 포근한 것만큼 위에서는 둥실거린다오.

내 생각이지만, 올려다보는 것보다는 옆에서 보는 것이 좋고, 옆에서 보는 것보다는 위에서 보는 것이 좋다오.

행여 늦은 계절에 왔다고 안타까워하지 마시오. 산성은 일주일 늦게 꽃이 피니 말이오. 세월을 조금은 잡아 놀 수 있다오.

여름이면 청남대 가는 길이 어떻소? 대통령 별장에 가는 길을 꾸미느라 좋은 나무를 많이 심어놓았다오. 그 가운데에서도 초여름부터 피는 산딸나무의 하얀 꽃은 볼만하다오. 꽃의 크기도 제법 큰데다가 모양이 열십자 꼴로 단정해서 조금은 비현실적인 느낌도 나오. 그래서 서양인들은 교회에 많이 심는다지요. 영어로 왜 개나무(dogwood)라고 하는지 생각해봤는데, 눈 올 때 개가 춤을 추듯이 꽃이 떨어질 때도 그래서, 그렇게 이름붙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산딸나무는 밤이 더 멋있으니 보름 무렵 늦게까지 걸어봅시다.

가을이면 대청호반 길을 걸어봅시다.

이 나라의 단풍이야 어디서도 즐길 수 있는 일이지만, 혹여나 노릇노릇한 은행나무 잎이 우리 마음을 야릇야릇하게 만들어줄지 어찌 알겠소? 그리고 붉은 단풍이 다 떨어졌다면 해질 무렵 물 위의 노을을 대신 누려봅시다.

겨울에 눈이라도 오면 기차를 타고 제천에 갑시다.

기차는 참 착하다오. 눈이 아무리 와도 잘 달리니 말이오. ‘나 돌아갈러를 외치던 ‘박하사탕’의 터널을 지나며 설국을 맞이합시다. 춥더라도 제천역에서 내려 의림지를 한 바퀴 돌아야 하오. 호숫가 호연정(浩然亭)에 올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야 하니 말이오. 호연지기가 별것이겠소? 배짱이오.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용기, 곧 도덕적 배포 아니겠소?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은 자연의 숭고함도 못 느낀다니, 감상을 위해서라도 큰마음을 키워봅시다. 그리고는 속이 보여 신기한 빙어를 보면서 우리 속도 투명하게 털어놓아 봅시다. 내 마음, 모두 드러내겠소. 활짝 열린 내 가슴을 말이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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