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 묻어나는 향기
손끝에 묻어나는 향기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6.02.2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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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산자락 끄트머리 작은 시골마을, 자주 찾는 할머니댁에 들렀다. 바가지에 행주를 들고 어수선하게 바삐 움직이시는 어르신 모습이 부산스럽다. 장은 정월부터 삼월까지 적당한 시기에 담지만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정월에 담근 장이 가장 맛있다고 하는데 좀 늦은감이 드셨는지 마음이 바쁘신 모양이다. 아직도 미련스러울 만큼 억지를 부리며 뒤뜰 장독대를 종종 잰걸음으로 오가며 항아리를 열심히도 닦으신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대를 이어온 항아리는 요즘 항아리처럼 반짝이거나 미끈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되레 투박하고 약간 빛바랜 듯 허옇게 된 항아리는 어르신의 허연 머리카락처럼 빛이 바랬다.

햇살 좋은 어느 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솥뚜껑 사이로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집안은 식구들 오가는 소리에 잔치분위기다. 마당 언저리에 솥 걸어놓고 장작불 활활 피워 누런 콩을 삶아 옛날방식 그대로 커다란 김장용 비닐봉지에 담아 발로 꾹꾹 밟아 으깬다. 으깬 콩을 메주 틀에 넣어 다시 밟으려니 아들은 허리도 아픈데 이젠 그만하고 사먹자며 심통 부리듯 투덜댄다고 하신다.

주말이면 맞벌이로 하고픈 일도 많은데 괜스레 짜증스러워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전화 한 통, 클릭한 번으로 만사가 해결되는데 웬 고생을 사서 하느냐며 툴툴대며 할 일 다 하는 아들이란다. 메주를 만들고 건조된 메주를 짚으로 새끼를 꼬아 매달고 이른 봄에 장 담그기까지 고집스럽게 전통방식대로 하는 어머니가 여간 불만족스러운 게 아니지만 언제나 아들 몫인 것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양 짚을 깔아 메주를 말릴 요량으로 볏짚만 다듬고 계시는 어머니. 몸 움직임이 예전 같지 않은 어머니 모습에 속내가 타는 아들, 연신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매년 찾아와 장 담그기까지 해 주는 아들 내외가 고맙단다. 어머닌.

장 담그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신문왕조에 처음으로 나오는데 신문왕 3년(683)에 왕비를 맞이하면서 보내는 납채(納采) 품목에 장과 시가 포함된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장을 담가왔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재료임에도 어르신들은 순서도 없는 레시피에 모양도 형식도 없이 뚝딱뚝딱 하는가 싶은데 한 접시 올려진 요리는 뭔가 다르다. 분명 그것은 흉내 낼 수 없는 어르신만의 손맛.

시대가 변하면서 주거 공간이 주택에서 아파트나 연립주택 형태로 바뀌면서 장독대가 없어지면서 항아리조차 보기 어렵다. 혹여나 장독대를 보면 신기하다는 듯 사진을 찍고 만져보며 야단법석이다.

당연히 메주쑤기 장 담그기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되고 체험학습장에 장을 담가보고 있다. 대를 이어온 장독을 신줏단지 모시듯 한 어르신들이 바라본 현대인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현실이다.

할머니 장독대에 햇살이 기울어진다. ‘한 고을의 정치는 술 맛으로 알고, 한 집안의 일은 장맛으로 안다는 속담이 있는 겨. 음식 맛은 장맛이라는 걸 젊은 것들이 아는가.’ ‘첫눈이 올 때 장독의 뚜껑을 열어두면 눈이 들어가 장맛이 좋아진다는데 내년에도 담글 수 있을까….’

점점 구부러진 허리, 콩 껍질처럼 거칠어진 손, 빈 콩깍지처럼 쪼글쪼글 말라버린 몸 때문에 할머니는 마음이 조급하신 모양이다. 항아리를 연신 닦으시며 던진 혼잣말씀, 지우려 해도 자꾸만 귓전에 맴돈다. 마당까지 드리워진 그림자, 오늘따라 구부정하게 허리를 부여잡은 할머니의 긴 그림자가 슬픔을 감추려는 듯 더 길게 드러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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