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부끄러운 것들 혐오 그리고 분노
동주! 부끄러운 것들 혐오 그리고 분노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6.02.2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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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버려질 것이 단 한 글자도 없는 절창을 기록한 뒤 나는 막막하다.

세 번째 <수요단상>을 쓴다. 시대의 혼란스러움과 변절을 맞닥뜨리며 삭풍을 견디는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 맺힌 절규와 결코 끊어지지 않는 수요 집회의 처절함.

그리고 어쩌다가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즉 대통령을 뽑거나 국회의원과 지방자치 지도자를 가리는 일의 무거움과 고단함을 온통 수요일이 도맡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참뜻은 무엇인지가 우선 궁금했다.

그리고 그런 수많은 일의 명멸에도 우리는 어쩌다가 이토록 말을 잃어버리고 방관에 가까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지도 여전히 어리둥절한데,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부끄러움에서 비롯된 일은 아닌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보면서 나와,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상의 부끄러움이 새삼스럽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고 노래한 시인 동주는 시(詩)만 써서 부끄러웠고, 좋은 시(詩)를 못 써 부끄러웠노라고 절규하면서 옥중에서 숨을 거둔다.

영화 <동주>에서의 시인 동주와 친구 몽규의 부끄러움은 서로 다른 모습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요된 진술서에 서명을 하거나(몽규), 서명을 거부하는 시인 동주의 극명한 차이는 나를, 그리고 우리 모두를 극한의 부끄러움으로 치를 떨게 한다.

독립운동을 제대로, 완벽하게 하지 못한 부끄러움에 대한 당당한 서명(몽규)과 오롯이 시(詩)안에서, 시(詩)를 잘 쓰지도 못하면서 비운의 조국 앞에 그림자였을 뿐인 자신이 부끄러워서 서명하지 못하는 동주. 그 순수와 열정의 부끄러움은 지금 그나마도 깨닫지 못해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를 무너지게 한다.

헬조선과 금수저 흙수저가 난무하는 극단의 혐오와 자기비하, 그리고 침묵과 외면은 결국 이런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세태에서 비롯된다. 차라리 분노해야 마땅할 대상을 혐오로 도치한다는 것은 다분히 현실도피와 외면, 그리고 침묵의 방식으로 무너뜨리는 것일 뿐임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야만과 다름이 아니다. 극단의 혐오보다는 차라리 분노하면서 야만의 탈을 지우고 철저하게 대상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혐오 대신에 분노해야 하는 수요일이 다가온다. 잘 말하고, 잘 들으며 (투표에 참여하는) 행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부끄러움의 힘은 후보자나 유권자 모두에게 필요하다.

“시(詩)가 힘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중략)우리 안에 시적인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략)우리 안에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가능성이 있어요. 우리는 낡은 인간성에 저항할 수 있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인간성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독일 출신 사회운동가이며 철학자 스테판 에셀은 <분노한 사람들에게>에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지금껏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분노해야 한다고 말한다.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오늘 밤’에도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의 내 얼굴’은 과연 얼마나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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