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丹齋) 정신이 그립다
단재(丹齋) 정신이 그립다
  • 임성재<칼럼니스트>
  • 승인 2016.02.1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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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

단재 신채호 선생의 서거 80주기를 맞는 마음이 착잡하다. 선생이 중국의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하시면서 갈망했던 우리의 민족의 자주권과 올바른 역사를 올곧게 지켜내지 못하는 부족한 후손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선생이 그의 논설 ‘독사신론’에서 쓰신 말씀이다.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활동하면서 백성들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민족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많은 논설을 썼고, 이순신과 을지문덕 같은 영웅들의 전기를 써서 널리 읽히도록 신문에 연재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민족주주의 사관에 바탕을 둔 최초의 역사서인 ‘조선 상고사’와 ‘조선 상고 문화사’ 등의 역사책을 써 올바른 우리 역사 확립에 힘썼다.

그런데 오늘 날 우리의 역사인식은 순국 80주기를 맞는 선생 앞에 부끄러울 뿐이다. 21세기를 맞은 문명시대에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강행으로 역사교육의 획일화를 초래하여 여러 나라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일본과의 종군위안부 협상은 국민적 합의도 없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타결하여 일제 침략의 만행에 면죄부를 던져주는 등 역사의식이 뒷걸음질 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국내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선생은 1910년 4월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안창호, 이갑, 이종호 등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중국에 들어간 선생은 청도를 시작으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상해, 봉천, 북경을 오가며 언론인으로 교육자로 역사가로 독립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가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분개하여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활동에 나섰다. 이때 무장투쟁단체인 의열단의 요청으로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선생은 ‘조선혁명선언’에서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간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일본을 강도로 묘사하고 무장투쟁의 정당성을 주장함으로써 국내외 동포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선생은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으며,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다가 대만 기륭항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던 1936년 2월 18일 중국 다렌(大連)의 뤼순(旅順)감옥에서 5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거나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통곡하려 한다.” 단재 선생이 「낭객의 신년만필」에 쓴 내용이다.

이 글은 오늘날에도 교훈적이다. 요즘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발사로 촉발된 개성공단 폐쇄 조치와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논란 등 북한 핵문제를 풀어가는 정부의 대책을 보면서 국민이 공감하고 나라 안에 녹아드는 정책이 아니라 외세의 정책에 끌려가는 나라라는 인상이 깊다. 이렇게 국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논란을 빚을 때 노예정신이 아니라 자주적인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통곡하려 한다.’는 선생의 정신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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