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세와 운명
운세와 운명
  • 최준<시인>
  • 승인 2016.02.11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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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최준

어렸을 적 설날이 되면 할아버지는 시골 고향집을 찾은 당신 자식들의 한 해 운세를 봐 주시곤 했다. 명절 때에야 만나는 아들 셋과 딸 둘을 앞에 앉혀 놓고 돋보기 너머로 손가락에 침 발라가며 뒤적이던 책자가 읍내 오일장 날 사 오신 토정비결이었다.

점쟁이가 아닌 평생 농사꾼이었던 할아버지가 운세 따위를 믿고 살 리 만무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진지했다. 객지에 흩어져 나가 삶을 살아가는 당신 자식들을 걱정하는 간절한 마음이 거기에 묻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읽어주시는 운세를 들은 고모와 삼촌들은 박자를 맞추어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은 장난기 섞인 재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모두 갑작스런 대운이나 액운이 끼어들 만한 삶들도 아니었고 그런 행운을 기대하며 살만큼 어리석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새해 운세를 생각하자니 언젠가 들었던 얘기가 문득 떠오른다. 자식들을 지붕 위의 박덩이처럼 올망졸망 낳아 기르는 찢어지게 가난한 사내가 있었다.

도저히 숨구멍이 트일 기미가 없어 한숨만 늘어가던 어느 날 탁발하는 스님이 찾아왔다. 혹여 부처님 은혜라도 입게 될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먹을 것도 없는 마당에 보리쌀 한 바가지를 시주했다. 사내가 건네는 보리쌀을 바랑에 담아 짊어진 스님이 사내를 쳐다보며 당신은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하고 떠났다.

사내의 운명은 그날부터 왕으로 바뀌었다. 방안에 누워 왕이 될 날만을 기다렸다. 아내와 자식들의 고생은 더 커졌다. 장차 왕이 될 분이라니 수발에 갖은 정성을 다했다. 자신들은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비단 옷에 흰 쌀밥과 고기를 올렸다. 사내는 배불리 먹고 천장을 쳐다보며 용상을 꿈꾸었다.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해가 바뀌고 십 년 세월이 몇 번 겹치는 사이에 사내의 얼굴에는 생의 주름 골이 패었다.

보료 위에 앉아서 아침마다 흰 머리를 빗어 넘기고 수염을 다듬었으나 집 밖 세상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세상은 그를 위한 궁궐은커녕 빗물 새지 않는 번듯한 방 한 칸도 내어주지 않았다. 오래전 왕이 될 운명이라 했던 스님의 말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생을 마쳐야만 하는가. 설혹 용상에 앉게 된다 해도 늙고 병든 이제 와서 누리는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절망에 빠진 사내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알았다. 자신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고생해 온 아내와 자식들이 불쌍해졌다.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은 왕이어야 했다. 말할 기력마저 없는 사내는 방문 앞에서 일생을 조아리는 큰아들을 불러들였다. 무릎을 꿇고 곁에 다가와 앉은 큰아들에게 사내가 말했다. 유언이었다.

“세자야, 짐이 붕어하신다. 왕비 들라 하라.”

사내는 마침내 왕이 되었다.

운세와 운명은 과연 타고나는 것일까. 새해라니 이런저런 생각이 더 많아진다.

건강과 행복을 비는 문자를 주고받고 전화 인사를 하느라 괜스레 부산스럽다. 해가 바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게 뭐가 있을까. 작년에 만났던 이들을 올해도 만나고 작년에 오고 가던 길을 올해도 오고 가면 그뿐이 아닌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삶의 희로애락은 올해도 여전할 것이고 당신은 당신으로 나는 나로 어제처럼 오늘을 살아갈 테다.

아무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생은 늘 오늘뿐일지도 모른다. 잠에서 깨어난 자신을 바라보고서야 비로소 오늘을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희망이라는 건 어쩌면 내게 없을지도 모를 내일에 대한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용한 도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오는 봄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희망 같은 건 갖지 않는 게 나을 듯도 싶다. 희망이 없으면 절망도 없다. 헛된 기대와 희망에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이 속고 절망해 왔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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