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의 분수령 하늘재 '계립령'
역사와 문화의 분수령 하늘재 '계립령'
  • 김명철<청주 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6.02.10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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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청주 서경중학교 교감>

조선 초기에 정인지는 충주를 가리켜 ‘우리 국토의 목젖’에 해당하는 곳이라 했다. 충주가 영남대로의 요충지임을 가리킨 말이다. 충주 일대는 원삼국시대부터 주목을 받던 지역으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졌으며, 이곳의 주인도 마한-가야-백제-고구려-신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충주로 들어오고 나가는 길들이 일찍부터 개척되게 된다. 수많은 고갯길이 개척되어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초기 문경새재(조령)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계립령이 서서히 쇠락을 길을 걷게 되었다. 태종 때 영남지방의 조운을 육로로 대체하면서 새로운 고갯길인 새재가 열리게 된 것이다. 국가에 의해 새재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상대적으로 계립령은 쇠퇴하게 되고 명칭도 하늘재로 바뀌게 된다.

하늘재는 충북 충주시 미륵리와 경상북도 문경시 관음리를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죽령보다 2년이나 먼저 개통된 하늘재는 지금으로부터 1850여 년 전인 156년 신라 제8대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개척한 길이다. 그 뒤로 신라가 북진 정책을 펼치며 한강 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리고 이 고갯길을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는 주요 전략 거점이기도 하였다.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란을 갈 때도 이 고갯길을 가슴을 치며 넘었고,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향할 때도 이 고개를 넘었다.

계립령은 시대와 국가에 따라 계립현, 마목현, 대원령, 마골점, 마골참, 하늘재 등으로 불려 왔다. 신라에서는 계립령으로, 고구려에서는 계립현, 마목현으로, 고려시대에는 대원령으로, 조선시대에는 마골점, 마골참, 하늘재로 불렸다.

국가와 시대마다 다르게 표기되었던 계립령은 실은 계립에 대한 방언과 관련이 있다. ‘저름’, ‘지릅’, ‘겨릅’ 등의 방언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계립( 立)’, ‘계립(鷄立)’, ‘마목(麻木)’, ‘마골(麻骨)’이고, ‘영’, ‘현’, ‘젼 등은 ‘재’라는 방언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문화적으로 계립령은 고구려의 불교문화가 신라로 넘어가는 교통로였다. 봉황리 마애불과 건 흥 5년 명 불상 광배 등 고구려 계통의 불교 유적과 유물이 충주로 유입되고, 이 고갯길을 넘어 신라로 불교문화가 전파된 주요한 경로였다. 그리고 이 계립령은 신라에서 꽃피운 불교문화를 다시 고갯길을 넘어 전국에 확산시킨 길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유적이 월악산자락에 깃들어 있는 월광사지다. 고려시대에도 이 고갯길을 통해 찬란한 불교문화가 꽃피었는데, 관음리사지, 미륵리사지, 덕주사지, 사자빈신사지 등이 이 주변에 자리를 잡은 것도 인연인가 보다.

하늘재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가 되는 고개인데, 이 고개 양쪽의 지명 또한 의미가 깊다. 충청북도에는 ‘내세’를 의미하는 ‘미륵리’라는 지명이 있고, 경상도에는 ‘현세’를 의미하는 ‘관음리’가 있다. 하늘에 대린 빗물이 북쪽으로 흐르면 한강이 되어 서해로 가고,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어 남해로 흘러간다. 이 고개는 백두대간을 넘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와 함께 현세와 내세의 갈림길과 같은 정신적인 길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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