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남과 나섬의 미학
물러남과 나섬의 미학
  • 임성재<칼럼니스트>
  • 승인 2016.02.0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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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칼럼니스트>

최근에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몇 가지 일을 지켜보면서 물러난다는 것과 나선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무상급식 분담금을 놓고 1년 넘게 이어졌던 충북도와 충북도교육청 간의 첨예했던 갈등이 마침내 끝났다. 두 기관이 마주 오는 폭주기관차처럼 한 치의 양보 없이 대립하다가 충돌 일보 직전에 합의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는 충북도교육청이 그동안의 주장을 접고 충북도의 안을 무조건 수용하는 백기 투항 수준의 물러섬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북도교육청은 두 기관의 대립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도민들에게 ‘그럴 거였으면 진작 충북도안을 그대로 수용하지 왜 싸웠느냐’, ‘충북도교육청이 처음부터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 아니냐’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합의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어느 한 쪽이 물러섬으로써 공멸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제는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일보다는 관계의 파트너십을 이뤄 나갈 것”이라는 김병우 교육감의 말은 이번 물러섬의 깊은 고민과 의미를 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노영민 국회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했다. 시집 강매논란으로 당 윤리심판원으로부터 당원자격정지 6개월의 징계를 받아 공천을 받기가 어려워졌다. 행위에 비해 징계가 너무 가혹하다는 여론을 등에 업고 재심을 요청하려던 억울한 마음을 접고 내린 결심이다. 불출마선언의 변은 “국민의 눈높이에서 보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윤리심판원의 결정을 존중 한다”는 것이었다. 중진 정치인으로 발돋움하는 4선 고지를 눈앞에 두고 출마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물러남을 선택하는 단호함을 보여주었다.

사실 ‘물러나다’의 사전적 의미는 자리에서 뒷걸음으로 피하여 몸을 옮기거나 하던 일이나 지위를 내놓고 나오는 것을 뜻한다. 글의 내용으로만 보면 단순하고 쉬워 보이지만 물러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긍정적으로는 양보와 냉정한 판단으로 보이지만 물러설 때의 불리한 조건과 상황을 고려하면 대부분 비겁함이나 패배로 비춰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러남의 진정한 의미는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을 낮추는 용기 있는 결단이다. 그래서 이렇게 단호히 물러서는 용기를 가진 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그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손자병법 36계의 제일 마지막에 있는 36번째 계책이 ‘주위상(走爲上)’이다. 여의치 않으면 피하라는 뜻이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줄행랑치라는 말이다. 이것이 상황이 가장 불리할 때 열세를 우세로 바꾸고 패배를 승리로 이끄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역사 속의 수많은 군웅은 물러날 때를 알고 물러나 최후의 승리를 거뒀는가 하면 또 많은 군웅은 물러나지 않았던 탓에 역사의 패자가 됐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나 이순신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물러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던 항우와 원균은 역사의 패자가 되고 말았다.

‘물러남’에 비해 ‘나섬’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포부와 야심만 있으면 될 것 같아서인지 활달하고 유쾌하며 진취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까? 누구나 나서는 데는 별로 망설임이 없다. ‘하고 보지 뭐’ 이런 식이다. 특히 정치의 계절에는 더욱 그렇다. 꼴뚜기도 뛰고 망둥이도 덩달아 뛴다. 누구는 특정인과 찍은 사진을 내걸어 그분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누구는 원로와 선후배들이 추대해서 나온다고 하고, 누구는 뜬금없이 나타나 지역을 위해 봉사하러 나온다고 한다. 모두 아전인수 격이다. 그러다 보니 현역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한 청주 흥덕구(을) 선거구는 예비후보가 열 명이나 된다. 그 자리가 진정 자신이 나와도 되는 곳인지를 엄정히 물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소치이다.

천재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남긴 말이 있다. ‘우리 자신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구경꾼의 입장으로 물러나면 이 물러남에 의해 세계는 객관적인 세계가 된다.’ 그 속에 있으면 볼 수 없는 것도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발 물러나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무언가에 나설 때 필요한 용기이다.

훗날을 위해 눈앞의 자존심을 꺾는 물러남의 결단이 아름다운 것처럼 이 혼탁한 정치의 계절에 객관적으로 나를 돌아보고, 그 깜냥을 스스로 철저히 점검한 나섬의 아름다움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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