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를 찾습니다
선비를 찾습니다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6.02.04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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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 강대헌

세상이 점점 더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얼굴에 철판을 깔은 것 같아. 저 빤빤한 낯짝 좀 봐.”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다른 건 없어도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 말이지.” “그야말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이야.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 따로 없구먼.” “자기가 벌거숭이인 걸 모르는가 보네. 알면 저럴 수가 없는 거지. 옷을 입고 있는 우리들이 되레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할 정도야. 어머, 저 사람이 천연덕스럽게 웃기까지 하네.”

이런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말의 홍수가 끊이지 않을 만큼 별의별 뉴스가 다 나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땅엔 파렴치한(破廉恥漢)만 들끓고 선비란 존재는 보기가 힘든 걸까요? 그렇다면 선비란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의 기준으로는 처신에 염치가 있으며 간절히 좋은 일을 권하고 화락(和)의 길을 걷는 사람이 선비일 것입니다.

반면에 치졸(稚拙)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즉 생각 또는 언행이 유치하고 졸렬한 사람이라면 선비의 길에서 이미 벗어난 것이겠지요. 학자(a learned man)로서의 선비보다는 덕이 있는 사람(a man of virtue)으로서의 선비를 찾고 싶습니다.

내친김에 선비와 같이 느껴지는 저널리스트를 소개하고 싶군요. J일보의 권석천 기자입니다.

오늘 제가 이 글을 쓰는 행위도 어쩌면 그가 지난해 1월에 썼던 ‘세월호 이후의 세상’이란 제목의 칼럼에 대한 애정 담긴 리액션(reaction·반응)인지도 모르죠.

그때 그는 이런 말을 쏟아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인간이 스스로를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부끄러움이 사라진 세태를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계층 상승 사다리가 사라졌다”고 개탄하면서도 내 스펙이 아들딸에게 세습되는 건 당연하게 여긴다. 아이들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거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다가는 이 사회에서 갑(甲)으로 살기 힘들다는 사실을.

눈앞의 이런 일들이 지난해 세월호 문제를 넘어서지 못한 업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세월호는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쓸 수 있느냐”는 철학자의 물음은 세월호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하루 비관론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세월호를 다시 대면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언저리를 맴돌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의 말이 거침없는 하이킥 같은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볼썽사나운 난타(打)는 아니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의 말을 다시 톺으면서 반성에 반성을 거듭하게 되고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는 선비들이 수두룩한 사회를 몹시도 꿈꾼답니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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