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뚜벅이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6.01.2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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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최명임

도로를 누비는 운전자들을 보면 내심 그 배포가 부럽다.

굳이 배포라고까지야?. 하지만 소심증이 있는 내게는 부러운 존재들이다.

뚜벅이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차가 없어 걸어 다니는 사람을 평가절하할 때 쓰는 말이란다. 가진 자의 자만에서 혹은 못 가진자의 자격지심에서 나온 말인지 그 경위는 모르겠으나 마음에 썩 와 닿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물어오면 “기름도 안 나오는 나라에서 애국해야지요.” 라고 너스레를 떤다. 여전히 운전대를 잡지 않는 것이 나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여러모로 좋다는 생각이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운전면허증의 용도는 가끔 엉뚱한 곳에서 내 신분을 대변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운전을 포기하게 한 사건의 발단은 아산만에서였다. 바다를 보러가자고 남편을 꼬드겼다. 속셈은 다른데 있었다. 열기도 채 식지 않은 면허증을 받아들고 흥분했다. 어쭙잖은 객기로 운전석을 넘보다 난감해하는 남편의 만류로 기회를 놓쳤다. 차들이 빠져나간 넓은 주차장에서 기어이 운전대를 잡았다. 내심 불안 속에서도 스릴 넘치는 기분은 10여분 화단 담벼락을 후려쳤다. 어엿하게 서 있던 반송이 난데없는 봉변을 당하고, 차는 사이드밀러는 물론 볼썽사납게 귀퉁이도 찌그러졌다.

문제는 남편은 물론 지나가던 사람까지 칠 뻔한 위기의 순간이었다. 화는 내지 못하고 붉으락푸르락하는 남편의 얼굴과 삿대질하는 사람의 손이 눈앞에서 오락가락 했다. 학원에서 함께 주행 연습하다가 수채 도랑에 처박힌 후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이가 생각났다. 그녀가 내리막길에서 밟아야 할 것은 액셀레이터가 아니라 브레이크였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광고 문구처럼 그녀도 평생 운전을 포기했을지 모르겠다.

겁 없이 달리던 차가 도로를 이탈해 아이의 생명을 앗아갔다. 졸지에 사고를 당하고 참혹해하는 엄마를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아이의 운동화는 연이어 지나는 차에 밟혀 나동그라지고 사고를 낸 여성 운전자는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눈앞에서 사고를 목격하고, 나는 물론 남의 안위까지 겁탈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식겁했다. 아이의 모습이 눈에 밟혀 밤잠을 설치고 소심한 성격은 끝내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속칭 뚜벅이가 된 배경이다. 걷다보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유롭다. 아주 작은 것에도 눈과 귀와 마음이 열리고 늘 거기 있던 무엇의 새삼스러움을 느낀다. 오만가지가 보이되 눈이 가쁘지 않고 생각은 많아지되 그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다. 알 수 없는 희열에 빠지기도 한다. 고개 숙여 내려다보면 새삼스럽게 땅이 거기 있다. 생명의 본질이되 교만하지 않고 많은 것을 소유하되 겸허하다. 숙여야만 볼 수 있음은 자중하라는 언질일까.

차들은 주인의 마음을 대변하듯 끼어들거나 앞을 향해 경적을 울려댄다. 기다림의 미덕도 느림의 미학도 사라진 듯 온통 질주하는 삶이다. 과속 페달을 밟는 사람들에게 느림은 갑갑할지언정 주눅 들 일은 아니다.

걷는 것은 잠시 나를 방목하는 것, 때로는 삶의 궤도를 이탈 무소속, 무소유의 자유를 꿈꾼다. 과감하게 탈속한 자연인의 삶은 바람의 종착지일까. 무게를 두지 않고 뚜벅이 인생을 살고 싶은 나는 가끔 어느 산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나를 상상 속에서 만난다. 바람처럼 가벼움을 느끼곤 한다. 허벌나게 바쁜 군상들 숨 가쁜 어느날, 한번쯤은 꿈꾸어보았을 느림보의 삶을 향해 나는 뚜벅뚜벅 걷는 뚜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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