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 응쌍팔
응답하라 1988, 응쌍팔
  • 정현수<칼럼니스트>
  • 승인 2016.01.2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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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정현수<칼럼니스트>

TV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끝났다.

고3이 되는 아들도, 드라마를 보지 않던 나도 달력을 보게 하였던 응팔(추억이 남다른 나는 응쌍팔이라 부른다)은 숱한 뒷얘기를 남겼다.

지난 16일에 방영된 최종회는 케이블 TV 프로그램 중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고단한 삶에 지친 시청자들에게 과거로의 추억 탐색이라는 제작진의 의도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1988년,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열기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그때 나는 춘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우리 학교까지 이어진 대로에는 무장한 전경들이 있었고 최루탄 가스가 안개처럼 도시를 뒤덮었다.

보도블록은 군데군데 뜯겨 나갔고 핏자국이 섬뜩하게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대로를 피해 골목길로 접어들면 방독면과 진압 복을 벗어던진 전경들이 널브러져 있다가 너는 대학 가서 데모하지 말라며 낮게 경고하곤 했다. 민중가요와 독재타도 구호가 확성기를 타고 봄날 교실 유리창을 넘었고 이어 ‘따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최루탄 가스가 교실 안으로 날아들었다.

시국에 관한 논쟁도 뜨거웠다. 일부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눈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군복을 입은 교련 선생과 학생 주임이 교실을 돌며 데모에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몇몇은 옷을 갈아입고 대열에 몰래 합류했다. 다음날이면 데모 무용담과 최루탄 가스가 교실 안에 자욱했다.

응쌍팔은 재미있다. 감동과 눈물도 자연스럽다. 추억을 추동하는 플롯에다 농익은 배우들의 연기가 완성도를 더한다. 나도 쌍팔년도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으니 극 중의 덕선과 친구들은 동갑이다. 가난하고 외로운 고학생이었지만 정신만은 준열했다. 교복 속에 감추고 있던 독재에 대한 나의 정신적 항거는 투석전보다 격렬했다. 사랑? 그런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단어였다.

응쌍팔은 다르다. 러브라인이 지나치게 어지럽다. 덕선과 정팔, 덕선과 택, 선우와 보라, 정봉과 만옥, 택이 아빠와 선우 엄마 등 등장인물 대부분을 사랑으로 얽어매고 있다. 온 국민이 연애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민주화 운동은 대학생인 보라가 데모하다가 붙잡혀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데서 그친다.

장담하건대 젊고 푸르렀던 우리의 관심은 연애가 아닌 민주화 시국에 고정돼 있었다. 그때 우리는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통과했었다.

심리학자 김정운은 기억이란 사실을 편집한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아주 오랜만에 누굴 만났을 때 특정 사실을 두고 다르게 기억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기억하고 싶은 대로, 불편하지 않은 상황만 편집해서 기억하려는 심리 때문에 사실과 괴리가 생긴 것이다.

응쌍팔이 민주화 투쟁을 비중 없이 다룬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대중에 어원을 둔 데모는 역설적이게도 대중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이 되었다.

1988년이 남긴 시대의 상처는 컸다. 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가고 다치고 심지어는 죽었다. 그때를 떠올리는 게 죽기보다 싫은 사람도 있지만,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으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때의 함성과 열정이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세상이 거꾸로 간다고 주저앉아 한탄만 하지 말고 정신을 준열히 하라. 1988에 대한 나의 응답은 민주화를 위한 열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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