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화내는 법
제대로 화내는 법
  • 이수안<수필가>
  • 승인 2016.01.17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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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이수안<수필가>

그날 해거름, 내 앞에는 승용차가 가고 있었다.

거리를 유지하며 나도 뒤따랐다. 음성 버스터미널 옆 사거리 앞에서 빨간색으로 신호등이 바뀌자 승용차가 멈추었다. 나도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마침 터미널에서 나오던 버스가 내 고물 트럭 오른쪽에 닿을 듯 바짝 갖다 댔다. 화난 표정의 버스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내 차로 성큼성큼 와 조수석 문을 거침없이 열었다.

기겁하는 나를 향해 그는 험한 말을 마구 쏟아냈다. 벌겋게 열이 오른 그의 얼굴은 마치 불 위에 올려놓은 주전자처럼 식식대며 끓고 있었다. 흥분한 그쪽의 말을 종합해보니 내 차가 터미널 출구 쪽 정지선을 밟았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버스가 내 차 뒤로 순서가 밀려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분노한 것이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를 구해 준 건 신호등이다. 다시 녹색으로 신호가 바뀌자 뒤의 차들이 빵빵댔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던 그도 여러 운전자가 경적을 울리자 할 수 없이 내차 문을 닫고 버스 쪽으로 갔다.

졸지에 당한 일에 얼이 나간 나는 어찌어찌 예술회관까지 차를 몰고 갔다. 주차를 하고 시동을 끄는 순간 둑이 터진 듯 참고 있던 감정이 솟구쳤다. 나는 운전대에 엎드려 한참이나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는지 생각해 보았다.

오십대 중반쯤으로 보인 그는 아마도 한 가정의 가장이었을 것이다. 자녀는 둘쯤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중 하나가 취직이 안 되어 자나 깨나 근심일지도 모른다. 한술 더 떠 아예 취직 같은 건 포기해버리고 집안에만 박혀 사회생활을 않는다면 부모의 근심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날도 종일 그 걱정으로 운전대를 잡았다면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게 되지 않았을까.

화는 나도 잘 낸다. 게다가 화나게 한 이유가 해결되지 않으면 쉽사리 풀지 못하는 질긴 면도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너나없이 왜 이리 화를 잘 낼까. 어떤 부당한 현실 앞에서 버럭버럭 할 뿐 그 부당함을 수정하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했던가. 여기에 생각이 이르자 화나는 일 앞에서 한 여성이 보여준 조용한 행동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얼마전 한·일 양국의 위안부 협상 타결 소식과 함께 시민들의 모금으로 설치한 소녀상을 철거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 없이 돈을 받고 그 일을 무마한다는 것에 많은 사람이 협상 무효를 주장했다. 피해 할머니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협상에 나도 대뜸 화부터 냈다.

한편 이를 찬성하는 ‘어버이연합’이라는 보수단체도 있었다. 소녀상으로 진입하는 그 단체 사람들을 막은 건 가냘픈 젊은 여성이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문구를 적은 피켓을 든 그녀는 잔잔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큰 소리 내지 않고 얼굴도 붉히지 않는 그녀의 메시지. 그러나 그 어떤 큰 규모의 시위 못지않은 큰 파문을 일으키며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날 해 질녘에 버스 기사가 그렇게 화를 낸 것도, 툭하면 화내는 나도 사실은 화내는 법을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문제 해결은커녕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것은 아닐까.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문구를 적은 피켓을 들고 미소 짓던 젊은 여성의 지혜를 통해 제대로 화내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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