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강요하는 사회
정답 강요하는 사회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6.01.17 19: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적자’생존. 지난해 유행했던 말이다. 이 말은 환경에 적응하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사회진화론과는 상관없이 언론과 사람들의 대화에 사용됐다. ‘적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누군가 ‘내로라하는 각계의 전문가들이 한 명의 비전문가가 쏟아내는 발언들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필사적으로 받아적는 희한한 풍경’이라고 비틀었던 그 장면에서 유래한 말이다.

공식적으로는 숱한 도덕적 하자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능력이 아까워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발표된 이 전문가들은 받아쓰기를 하는 내내 한마디 토조차 달지 않는다. 토를 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는 이견도 있지만 명색이 대한민국을 경륜하는 인재들의 소신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한치의 오류도 없는 금과옥조 앞에서 이견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적어야 산다’는 구호는 대학에서도 위력적이다. 한 교육학자가 TV에 나와 이런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서울대에서 평균 A학점 이상을 받은 수재 중의 수재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를 대면 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결과는 ‘적자’ 우월이었다. 고학점자 대부분이 교수의 강의를 토씨하나 빼놓지않고 받아적는 필기파들이었다. 교수의 강의를 꼼꼼히 필기하고 달달 외워 시험때 답안지에 고스란히 옮겨놓는 학생들이 대부분 최고 학점을 받았다. 한 학생은 강의 시간을 교수의 논리를 분석하고 사고하는데 허비(?)했다가 낭패를 본후 무조건 받아적는 필기파로 전향해 성적을 올렸다고 고백했다.

열띤 격론으로 일관하는 하버드대 마이클 셀덴 교수의 명강의 ‘정의’를 기대하고 대학에 간 학생들은 오직 시험을 위해 적고 외워야만 했던 고등학교 교실로 되돌아가야 했다. 시험을 볼 때 교수에게 배운 답과 자신이 생각한 답이 다를 경우 어떤 답을 썼느냐는 질문에도 절대 다수가 교수의 답을 적었다고 했다. 학점 앞에서 학생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질식하고 있지만 대학들은 여전히 큰 학문을 가르친다며 ‘대학’ 간판을 내걸고 있다. 학생들이 남의 답, 이미 존재하는 낡은 답을 이식받기에 급급한 대학에서 나만의 답, 새로운 답이 창출될 리 없다. 이런 시스템에서 배출된 엘리트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받아 적기에 능숙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받아 적은대로 현장에서 실천하면 탈 날일이 없다는 요령을 일찌감치 대학에서 체화했기 때문이다. 내 답 찾을 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남의 연구나 실적을 베끼는 것이 일상이 돼버려 표절이 더 이상 부끄럽지않은 나라가 돼버렸다.

지난 연말 일부 대기업과 공기업이 면접에서 입사지망자들에게 국정교과서 찬반 의견을 물어 구설에 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도심 집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한 기업도 있었다. 대기업이 지망자들의 사상 검증을 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그러나 이 질문으로 답변자의 사상을 체크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미 정답이 노출된 질문에 굳이 오답을 내놓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국정교과서는 대부분 찬성했을 것이고 나머지 질문들에 대해서도 진의를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답을 강요받는 사회는 역동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내 목줄을 틀어쥔 인사권자의 말이 유일한 정답이고, 학점을 결정하는 교수의 논리가 정답이고, 일자리를 줄 고용주의 철학이 곧 정답이자 진리인 곳에서 다양성과 개방성에 바탕한 창의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정보 강국으로서 한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과 징후가 속출하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한참 뒤처졌던 중국은 조만간 우리를 추월할 기세다.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느냐는 자문과 자성도 이어지고 있다. 21세기 국가경쟁력은 고도의 창의력에서 결판난다고 하지만 우리는 아직 유아독존적 19세기 리더십과 계량적 실적에 집착하는 능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래 세대들까지 주어진 정답을 받아 적기에 급급한 기계형 인간으로 만드는 나라가 21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활로는 이 절박한 의문에서 모색돼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