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 사냥
사슴 사냥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6.01.1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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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연말 연초를 십장생 사슴 이야기와 함께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만수무강을 빈다.

‘디어 헌터’(deer hunter)라는 미국영화가 있었다. 사슴 사냥꾼이라는 이야기인데 실제로는 월남전 영화다. 사슴 사냥과 월남전이 교묘하게 겹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밤새도록 결혼식 피로연을 끝내고 새벽에 사슴 사냥을 떠난다. 우정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세계가 죽이고 죽이는 관계임을 보여준다. 친구들과의 사냥을 하는 것은 ‘재미’의 극대화다. 친구끼리도 재밌는데 사냥까지 끼면 남자들로서는 더 이상의 재미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떠난 베트남은 재미가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다. 나만 안 죽으면 가장 재밌는 것이 전쟁이라는데 문제는 내가 바로 사냥감이 된 것이다. 내가 죽지 않으려면 남을 죽여야 한다. 남이 죽으면 내가 산다.

월맹군 밑에서 끔찍한 포로생활도 잘 버텨냈는데 한 친구가 민간인이 되어 도박에서 ‘가장 재밌다’는 러시안 룰렛의 전설이 된다. 둘이 목숨을 걸고 6발 가운데 1발이 장전된 리볼보를 주고받는다. 남이 죽는 대신 친구는 살아남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의 정신은 이미 나간 상태다. 미친 것이든, 약을 먹었든 이미 포로생활에서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그 친구를 구하러 간 주인공은 그를 구하기 위해 룰렛에도 뛰어들지만 결국 친구를 잃고 만다. 다시 놀아온 고향. 사슴 사냥을 떠난다. 정조준 시야에 장엄한 자연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사슴이 들어온다. 그러나 더 이상 쏠 수 없는 나다.

그리스에서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해보았다. 이방인에게도 친절한 그리스인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본 사람이 갖고 있는 환상이겠지만 그들 마음속 한 구석에는 조르바를 기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무한대의 술, 양고기와 감자요리, 그리고 큰 무대에서 벌어지는 군무. 취하면 춤을 췄고 목마르면 마셨다. 그렇게 밤은 지나갔다. 밤을 새는 것이 바로 그리스인의 결혼식이었다. 얼마나 퍼마셨으면 여관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입구 소파에서 쓰러졌을까. 그래도 그런 광장-아니, 작은 야외극장이라고 해야 옳겠다-에서 벌어진 축제를 잊을 사람은 없다. 결혼식은 이렇게 함께 하는 것이다.

아침에 사냥을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런 결혼식이 그리스식이라고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디어 헌터’의 친구들은 바로 이렇게 정감 많은 그리스계 미국이민자였던 것이다. 사실이 어쨌건, 난 그렇게 믿는다.

아이를 낳고 나서 생물을 못 죽이겠다고 이모부가 고등학생인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나도 그런 기분을 종종 느낀다. 벌레를 보면서도, 개를 보면서도 너나 나나 같은 운명이라고 느낀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잠자리 몸통을 자르고 개구리를 팽개치면서 논 것이 아찔하게 느껴진다. 생명을 낳고서야 생명의 경건함을 느끼게 되나 보다.

이모부는 언젠가 바닷물이 자꾸 무서워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해병대 수영교관이었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더니만 어느 순간부터 물이 무서워진다고 했다. 특히 검푸른 바닷물을 보면 들어가기 겁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댄 이유가 ‘나이가 들면서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지…’였다. 나도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지 요즘은 밤도 무섭고, 별도 무섭다.

연기자 문성근은 ‘디어 헌터’의 주인공이었던 로버트 드니로가 매우 밉다고 했다. 눈길을 안 줘서 남의 시선을 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젊어 세상을 뜬 이모는 신인이었던 문성근이 참 맘에 든다고 했다. 식물성으로 보인다고. 오늘 난 동물의 왕국에서 식물을 꿈꾼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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