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힘으로 몽고를 격퇴한 `충주 대림산성'
민중의 힘으로 몽고를 격퇴한 `충주 대림산성'
  • 김명철<청주 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6.01.1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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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불굴의 의지와 인내심, 끈기 등의 민족성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할 수 있었다. 세계를 제패했던 몽고의 침략에도 우리는 당당하게 고려라는 국가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고의 제1차 침입 때 충주에는 양반별초의 관군과 노군잡류별초라는 일반 백성과 노비로 결성된 두 부대가 있었는데 관군과 양반별초는 충주 부사 등과 성을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때 이들이 피난간 곳이 월악산에 있는 덕주산성이었다. 그럼에도 충주성은 온전하였는데 이는 노군잡류별초군이 노비들과 함께 침략군인 몽고군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고종 40년 여름 몽고는 야굴이라는 장수를 앞세워 제5차 침입을 강행했다. 야굴이 이끄는 몽고군은 양주, 여주의 두 성을 함락하고 충주를 포위하였다. 무려 70여 일 동안 계속 충주성을 위협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오랜기간 포위 속에서 군량이 거의 떨어지고 계속된 전투로 모두 지치게 되자 김윤후는 병사들을 격려하며 지난날 노군잡류별초들이 싸워 이긴 것을 상기시키면서 “만일 능히 힘을 내 싸워 이긴다면 귀하고 천한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 관작을 제수케 하리라(若能效力無貴賤 悉除官爵)”하고 관노의 호적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적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을 나눠 주었더니 자유를 갈망해 오던 관노들은 감격해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하였다. 이에 몽고군은 충주의 공략이 불가능함을 알고 후퇴하였다.

이 전투는 대몽항쟁에 길이 남을 전쟁사적 승전이면서도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는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이 만들어낸 인간승리로 평가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충주는 몽고군의 침략 초기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몽고군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은 전국 유일의 지역이 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고종 41년(1254년)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으며 예성(蘂城)이란 호(號)도 주어졌다.

몽골의 침입을 물리친 자랑스러운 이 산성의 위치에 대해서 전에는 시내와 가장 가까운 충주산성일 것이라 추정했으나 이제는 충주 대림산성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대림산성의 전체 둘레는 약 4906m로 큰 규모의 포곡식 산성이다. 부분적으로는 돌로 쌓았지만 대부분은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성이며 성벽의 높이는 대략 4~6m로 산성 곳곳에 치성, 망루, 장대 등도 설치하였다. 성벽을 쌓은 형태로 보아 신라의 양식이 많이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인데 고려시대에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급히 보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는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 때의 중원경을 충주부로 개칭한 것인데 이는 고려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해서 ‘충성스러운 고장’이라는 의미로 충주라고 했다. 충주가 지리적으로 나라의 중심(中+心=忠)이 되는 것도 반가운 일이고 역사의 한 장면에서 충성을 다한 자랑스러운 의미를 가진 명칭이면 더 더욱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충분하다. 특히 고려시대 대몽항쟁은 매우 의미가 크다.

전 세계가 칭기스칸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을 때 충주는 몽고와의 9차례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무엇보다 항쟁의 주체가 백성과 천민, 노비였으므로 충주 시민은 물론 우리 고장 충청도민의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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