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12시, 정오의 사고
낮 12시, 정오의 사고
  • 이영숙<시인>
  • 승인 2016.01.11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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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영숙

아슬아슬한 로프에 매달린 채, 수천 년 바위를 덮은 눈과 독대하며 그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히말라야’의 주인공 엄홍길 산악인. 사람들이 그에게 산을 정복할 때 어떤 기분이 드느냐고 묻는다.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허락해 주셔서 잠깐 머물다 내려가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나 자신을 만나는데 극한의 순간에는 가면을 벗은 맨얼굴이 나온다. 아마도 대부분 사람은 제 얼굴을 모른 채 살아갈 것이다.” 우문현답이다.

산악인에게 산은 성전이며 몸은 그대로 기도이다. 빛은 자체로 큰 무기이고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무한처럼 펼쳐진 설산에서 설맹(雪盲)에 들 때 내면으로 창을 트는 시야, 이 우주에 던져졌을 태초의 모습을 만날 것이다.

설산에서의 면벽이 내면으로 길 트는 시간이라면, 낮 12시, 정오 시각의 눈뜸도 자아(自我)로 복귀하는 자연의 시간이다. 머리를 쥐어짜는 고통 없이 그대로 해석 가능한 모습, 그림자의 길이로 원형을 분석하는 시간이 아니라 민얼굴, 민낯 그대로 드러내는 시간이다. 가면을 쓴 자아와 민낯의 자아, 지킬박사의 모습에 어룽거리는 하이드, 그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이드(id)가 아닐까.

히말라야는 신의 허파이다. 그들은 영원한 신의 영역에 오르면서 무엇을 알고자 했던 것일까? 시인들이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을 찾아 문장 등반을 하며 진아(眞我)를 찾아가듯, 어쩌면 산악인들 또한 진아 찾기의 과정일 지도 모른다.

위태로운 로프에 목숨을 걸고 면벽의 시간에 드러낸 실존은 질료와 그림자가 일치한 시점이다. 모래에 꽂은 막대기와 그림자가 일치하는 시간이 낮 12시, 정오의 시간이다.

히말라야 곳곳에 이정표처럼 누워있는 수많은 주검, 그 주검들을 안내판 삼아 산을 오르는 산악인들, 아이러니한 그 모습이 우리의 인생이다.

한 세기도 못살면서 영원히 살 것처럼 탐욕의 바벨탑을 쌓고 사는 우리, 리허설도 없는 단막의 무대에서 무엇을 얻자고 하는 것일까.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도 그 많은 부로도 자신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하늘 가는 길에 어마한 금고의 동전 하나 가져가지 못했다. 생전에 일을 빼놓고는 즐거움이 별로 없었노라는 그의 고백은 땅강아지처럼 땅만 보며 사는 우리에게 향한다. 아테네 철학자 소크라테스하고 한나절을 보낼 수만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주겠다는 그의 웃픈 이야기는 지금 살아있는 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창고에서 미처 걸지 못한 달력을 꺼냈다. 망치로 탕탕거리며 못을 박고 시간을 건다. 못 치는 소리가 가슴으로 이동할 때 지난날 나로 살지 못한 시간이 의붓자식처럼 서성이다 쓰레기통으로 하강한다. 늘 연초의 다짐이 그랬듯이 낮 12시, 가면을 벗어던진 정오의 자아로 사는 길을 모색한다.

지금쯤 하늘에서 스티브 잡스가 소크라테스를 만났다면 무슨 말을 들었을까? 무대에서 내려와 “너로 살라!”고 주문했을 것이다.

살면서 긴 그림자를 만드는 일, 조명 드리운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 타자로 살아온 삶의 모습이다. 이대로 망치를 들어야 한다.

잘못된 신념은 과감히 깨부수고 낮 12시, 정오의 시간에 머물면서 민낯으로도 행복하게 사는 길을 터야 한다. 그것이 병신년 새해, 붉은 원숭이처럼 나무에서 자유롭게 재주부리며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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