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메랑
부메랑
  • 최명임 <수필가>
  • 승인 2016.01.11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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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최명임<수필가>

아침 뉴스에 가덕도의 멧돼지 열 한마리가 제 영역을 이탈해서 소동을 일으켰단다.

2㎣ 거리의 바다를 헤엄쳐 뭍에 도착한 녀석들의 소동으로 난데없는 전쟁을 치렀다. 다섯 시간에 걸친 멧돼지의 사투는 패배로 끝나고 모두 사살되었다. 승전보와 함께 나란히 누운 주검들은 SF영화의 전사를 보는 듯 장렬했다. 죽음을 감수하리라는 그들의 처절한 반란이었다.

최근 멧돼지의 행패가 부쩍 잦아졌다. 야금야금 농작물을 훔치는 것에 불과하더니 시골 인가는 물론 도심 곳곳에 출몰해서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한다.

논밭 가장자리에 철망을 두르고 총소리를 녹음해 시간마다 위협을 해도 천적이 사라진 이 포식자의 허기 앞에는 무용지물이다.

산중 짐승이 인간의 영역에 자주 나타나는 기현상은 무슨 까닭일까. 고속도로에서도 처참하게 깔려 죽은 고라니를 자주 보게 된다. 형체를 알기 어려워서 그렇지 청설모의 희생도 부지기수다.

어처구니없게도 찻길에서 횡액을 당하는 그 사실보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이미 생태계의 파괴로 지구가 병들고 있다는 그 점이다.

자연계는 무수한 생명이 어우러져 공생하고 있다.

어떠한 이유로 그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공생관계는 깨어지고 언젠가 불균형의 여파가 세상 곳곳으로 쓰나미처럼 몰려올지 모른다. 아비규환 속에서 방주를 띄우고 우주의 미아로 떠도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아주 먼 미래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그 즈음 일거라는 안일함으로 말이다.

자연은 인간의 안위와 모든 생명을 위한 마지막 보루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개발과 지킴의 이익개념 그 양면의 논란을 무시한 채 여전히 재앙의 바벨탑을 쌓고 있다.

스스로 던진 부메랑이 언젠가는 되돌아와 허를 찌르게 될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부메랑을 보며 어찌 발도 날개도 없는 것이 되돌아올까 생각하다, 우리 삶의 복선을 깔고 있는 듯 한 그 물건에 묘하게도 마음이 끌렸다.

아득히 원시의 숲에 한 전사가 살았을 게다.

부족의 추장이거나 신령한 주술사라 해도 좋겠다.

지혜의 영(靈)을 가진 그는 숲의 정적 속으로 들어가면 가없는 언어와 숨결을 느꼈고 그 신성함에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심안은 인간이 곧 숲이라는, 숲은 뭇 생명의 원천이라는 불가분의 이치도 잘 알고 있었다. 미래를 꿰뚫어보는 영묘한 눈도 가졌을 게다. 하여 그 미래에 사라져가는 숲을 보았을 테고 그 숲이 지켜지길 간절하게 소망했을 것이다.

아이들을 앉혀놓고 청빈의 사냥 법은 물론 부족들이 살아온 숲의 내력과 그 소중함도 누누이 들려주었을 게다.

그럼에도 안타까워 매 순간 자각하며 살기를 바람으로 자신의 이름을 따 만든 것이 부메랑이었을까. 내게서 나간 것은 내게로 되돌아온다는 삶의 이치를 반원의 틀에 새겨 넣고 나머지 반원은 후손들이 채워 완전을 뜻하는 원을 이루어도 좋겠다는 염원의 도구였을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과거의 숲을 넘어 시공을 초월했다.

우리는 자업자득의 삶을 반추하는 부메랑을 보며 지혜의 영 그 전사를 만난다.

수없이 날아오르고 되돌아오되, 무엇을 던졌느냐에 따라 돌아오는 것도 다르다.

꿈을 쏘아올린 사냥꾼의 파랑새가 될 수 있고 오만의 도구로 이용하면 재앙을 불러들이는 엄청난 파괴력도 가지고 있다.

내가 이 순간 짓는 업 또한 언젠가는 되돌아올 터, 선업을 쌓고 볼 일이다.

이 순간도 부메랑은 수없이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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