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새벽
새해 첫 새벽
  • 반영호 <시인>
  • 승인 2016.01.0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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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 반영호

지난해 여름은 유난히 강수량이 적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초겨울로 들어서면서 200여 ㎜가 내렸다. 지난달 남서쪽에서 다가온 저기압의 영향으로 흐리고 비가 온 날이 많았고 엘니뇨의 간접 영향으로 수증기가 많이 유입돼 비가 자주 내렸다.

지난달 많은 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56년만의 가뭄은 계속되고 있고 요즘 또 여전히 소량의 비와 눈이 질척거리며 내린다.

병신년 새해가 밝았다. 지난해 채우지 못한 강수량을 만회라도 하는 듯 벽두부터 눈 소식이다. 눈이 내린다. 하얀 눈이 내린다. 하양보다 하얀 흰 눈은 희다 못해 푸르게 시려 흰 물감으로도 채색할 수 없는 눈이다. 아무리 생각해보고 둘러봐도 찾아낼 수 없는 오리지널 하양이다. 하늘에서 뿌려주는 하얀 눈인데 오죽 여느 하양에 비할까만 하늘이 주시는 하얀 눈은 축복 같다. 신성한 축복.

아침에 창문을 열면 온통 하얀 천지. 밤새 몰래 내린 눈. 황홀한 아침. 눈은 눈을 홀리게 한다. 어둠 말고는 무엇으로도 할 수 없는 마술을 걸어 놓는다.

멀쩡한 현실이 감쪽같이 바꿔치기 된 세상을 바라보노라면 신비함에 망연자실하다.

하늘이 아니고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개벽이다. 천지를 창조하셨으니 천지개벽 또한 그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리라.

눈 내리는 날이면 김광균의 설야(雪夜)가 떠오른다.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그리고 난 이 아침, 참을 수 없는 시상이 발동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밤새 하얀 눈이 내렸다/ 맑은 영혼을 갖은 분의/ 큰 능력으로/ 혼탁한/악의 무리를 조용히 평정시겼다// 꿈결인 듯 아무 소요도 없이, 밤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짓처럼/ 세상을 말끔히 정화시킨 높은 분이시여.

아침에 일어나보니/ 밤새 하얀 눈이 내렸다// 어느 맑은 영혼을 갖으신 분이/ 큰 능력으로/ 혼탁한 지상/ 악의 무리를 평정하시겠다더니/ 아무 소요도 없이, 밤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예감이었을 뿐 포고 없이/ 온 세상을 맑고 맑게 정화시켜 놓으신 높은 분이시여// 설사 전쟁이 아닐지언정 사전포고도 없이/ 온 세상을 하얗게 바꿔놓다니// 혈전 없이 온 세상을 단숨에 점령해버린/ 높으신 분이시여.

그렇다. 눈 오는 날은 왠지 세상이 다 고요한 듯하다.

눈이 오면 조용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눈 결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입자와 입자 사이에는 많은 틈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흡음재의 구멍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주변의 소리가 수많은 구멍의 여기저기에 부딪치고 반사되는 사이에 소리가 갖고 있는 에너지 대부분이 열로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눈이 오는 날은 유난히 조용하고 아늑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병신년 새해 그 하얀 눈길을,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오솔길을 혼자 걷고 싶다. 그리고 이런 시를 쓰고 싶다.

우주를 방황하는 내 허황이/ 눈이 되어/ 소리 없이 지상에 안주하리/ 그러면 그대여/ 새해 첫 새벽/ 아무도 밟지 않은/ 첫눈 쌓인 오솔길을/ 자박자박 범해가며/ 첫 사람으로 오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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