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효자 경연과 효촌리
만고효자 경연과 효촌리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 승인 2016.01.0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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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효는 인륜의 기본이며 충의 근원이다. 사람의 선행 가운데 단연 으뜸은 효행 즉 효의 실천이다. 삼강오륜에서도 부위자강(父爲子綱)과 부자유친(父子有親)이 기본이지 않던가. 부모에게 효행하지 않으면서 충을 말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위선이다. 사실 옛날에는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었지 나라에 충성하라는 덕목은 없었다. 군위신강과 군신유의는 있되 나라(國)를 위해 목숨 걸고 헌신하라는 강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봉건시대에는 임금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기에 충신이라 하였지만,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 민주국가에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애국자 의사 열사라 칭한다.

각설하고, 조선시대의 삼강행실도와 각종 지리지에 보면 충신보다 훨씬 많은 효자가 수록되어 있다. 충신은 보통 전쟁에서 나오는데 반해 효자는 언제 어디서나 나올 수 있긴 하지만 평생을 하루같이 효를 실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효자는 전시에 태어났다면 곧 충을 실천했을 사람들이다. 조선의 효자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만고효자라 칭송된 경연(慶延)이다. 경연은 청주경씨로 자는 대유(大有)이고 호는 남계(南溪)이며 좌랑 경신직의 아들로 세종 초인 1420년대에 청주목 남일면 모산, 즉 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효촌리에서 태어났다. 주로 성종 시기에 활약한 것으로 기록에 보이고 있으나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1450년(문종 1)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훈도로 있으면서 부모를 극진히 모셨는데 아버지가 병이 들어 겨울에 생선이 먹고 싶다고 하니 얼음 속에서 고기를 잡아 봉양하고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했다.

경연의 효행은 「성종실록」에 자세히 전하는데 1472년(성종 3) 충청도관찰사 이영유가 성종에게 보고하여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부임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병환 중일 때는 한겨울에 눈이 쌓인 시루봉에서 고사리를 따다가 국을 끓여 봉양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 3년 상을 마친 후 1476년 5월에 우승지 임사홍이 ‘청주에 사는 경연은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어 살았을 때 봉양하고 죽은 뒤에 장례를 지내는데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고 흠모하고 있습니다. …그 효성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 고을뿐만 아니라 전국이 감동하고 있으며 조정에서도 그 효성을 칭찬하는 소리가 자자합니다. 이제 경연을 특별히 발탁하여 등용하시고 정문을 세워주며 복호(戶)하여 그의 효행을 드러나게 하시길 바랍니다.’하여 성종은 좌의정 한명회와 상의한 후 경연을 직접 불러 사람됨을 살핀 후에 이산현감에 임명했다.

효촌리는 효자 경연이 살던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효자비가 잘 보존되어 있다. 가까운 운동동에는 경연의 효행에 감화되어 동네 불량배였다가 효자가 된 양수척의 효자비가 있다. 양수척 효자비는 2009년에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경연의 효자비는 주민들의 반대로 계속 보류 중이다. 지난해 충북문화재위원회에서는 경연 효자비의 문화재지정을 의결하였지만 거리를 가득 메운 결사반대 붉은 현수막과 머리띠 두르고 몰려든 수백명 주민의 반대로 또다시 막혔다. 보호구역을 제외한 주변의 규제를 거의 없앴는데도 무조건 반대하니 당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듯하다.

경연이 높은 벼슬을 하였거나 학문적 업적이 뚜렷하지 않음에도 청주사림의 본향인 신항서원에 배향된 것은 바로 효의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을 출신지역에서 선양하지는 못할망정 마을의 정체성을 지닌 효자비마저 애물단지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효촌리를 지날 때마다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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