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 꿈
사슴 꿈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5.12.3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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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열애의 후유증을 앓는 남자 제자를 만났다.

그녀는 ‘더 깊어지는 것이 무서워 떠난다’고 했단다. 사람의 마음은 깊다. 알 수 없는 부분도 많다. 그녀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정인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한동안은 분명히 서로 탐닉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떠난 그녀, 어떻게 그녀를 잊을 것인가? 서로 맞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렇게 서로 좋아하다가, 그렇게 두부 자르듯 떠날 수 있는 것인가?

휑한 얼굴에서 핏기가 도는 얼굴로 돌아온 그 친구에게 물었다. 어떠냐고. 순수할수록 집착이 강하다. 그 친구가 그랬다.

몇 년, 몇십 년을 갈 수도 있었다. 내가 만난 가장 심한 경우는 두 번의 만남으로 20년 상사병을 앓는 사람이었다.

혹여나 그 친구도 그럴까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의 물음에 자신의 꿈 이야기로 대답했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여는데, 큰 뿔을 단 사슴이 딱 버티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몸은 옆으로 한 채,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어요. 한참 동안 그러다가 머리를 바로 했지요. 그렇게 서 있었어요. 그러다 꿈에서 깼는데, 그 꿈 이후 그녀가 내 꿈에 더 이상 나오지 않네요. 그렇게 정리가 되었어요”

사슴같이 보이는 동물은 많다. 북미에는 무스(moose)라는 놈이 아주 커서 차와 박으면 그 뿔이 앞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서 인사사고가 난다고 들었다. 캐나다 친구의 말이었다.

실제로 본 무스는 정말 컸다. 사슴이 아니라 말에 뿔을 단 것 같았다. 말도 조랑말이 아니라 경주마다. 그리고는 엘크(elk)다.

사전적으로는 현존 사슴 가운데에서 가장 크다고 하니, 무스는 사슴이 아닌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동안 사육이 유행해서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 친구는 엘크 같다고 말했다. 덩치가 컸단다.

고라니도 있다. 요즘 로드킬 덕분에 많이 눈에 띈다. 사슴보다 작고, 사슴만큼 겁이 많고, 사슴처럼 새끼와 함께 다닌다. 그러나 꼴은 사슴처럼 예쁘지 않고 단색이라서 초라하다. 강아지로 치자면 새끼누렁이다.

꿈에 나온 그 사슴은 여자였을 것이다.

남자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슴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크게 생각했다. 그렇게 큰 모습으로 여자는 남자에게 왔다. 하다못해 큰 뿔을 달고 한껏 멋을 부렸다. 왕관을 쓴 여자였다. 거대하면서도 위협적인 왕관을 달고 여자는 남자에게 왔다. 보통의 여성이 갖고 있지 않은 남성을 여자는 뽐내었다. 남자를 이끌고 녹였다. 어르고 달래는 것은 여자였지 남자가 아니었다.

여자는 남자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진정 여자가 남자를 좋아했던 것은 맞다.

남자를 여자는 기다렸고, 만났고, 사랑했다. 그러나 한동안이었다. 얼마 동안이나 여자가 남자를 사랑했던지 간에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사슴이 나를 바라본 시간만큼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눈을 끔뻑이지도 않고 사슴이 바라보는 동안, 바로 그동안만, 여자는 남자를 위로하고 차지하고 향유했다.

그러나 사슴은 몸을 옆으로 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부터 여자는 남자 쪽으로 걸어올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남자를 뿔로 박을 생각도 없었다.

여자는 자기가 갈 길이 있었다. 그 길로 그렇게 떠났을 뿐이다. 그렇게 남자는 여자를 정리했다.

언젠가 나에게도 사슴이 나타날 것을 믿는다. 아니, 그 사슴은 언젠가 또 떠날 것을 믿는다. 한 해의 마지막 날만 남았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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