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
냄새
  • 정명숙<수필가>
  • 승인 2015.12.2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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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정명숙

시간이 지날수록 집안 곳곳으로 빈틈없이 스며들고 있다. 해마다 겪는 일이다. 나만 메주 뜨는 냄새가 좋은 건가. 하루에 서너 번은 환기를 시키지만 외출했다 돌아오는 식구들도 이 냄새가 싫지 않은 눈치다.

저무는 해를 며칠 남겨놓고 메주를 쑤었다. 김장을 해놓고 나면 바로 메주를 만들어 놔야 겨울준비가 완벽하게 끝났다는 생각에 한숨 돌리곤 했는데 뜻하지 않은 우환이 생겨 허둥대느라 콩 자루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었다.

출산예정일이 가까워진 큰딸이 집에 와 있는 중에 작은딸의 약혼자에게 암이 발견되었다. 꽃피는 사월에 전통혼례를 올리기로 한 외국인 사윗감이다. 막막했다. 험난한 딸의 앞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허나 나를 바라보는 파란눈동자가 불안에 떨며 눈물 흘리는 것을 보자 나는 주저 없이 그를 끌어 않았다. 걱정하지 말라고, 너도 우리의 가족이니 끝까지 책임질 거라고 고장 난 테이프처럼 반복해서 말했다.

딸에게는 당장 직장을 그만두라 했다. 네가 사랑하고 선택한 사람이니 최선을 다하라 했다. 서둘러 환자를 서울의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청주에서는 환자의 상태를 아주 안 좋은 쪽으로만 얘기했는데 서울에서는 달랐다. 다행히 전이가 되지 않아 암세포가 발견된 부위만 일단 수술하기로 날을 잡고 집으로 왔다. 희망이 보였다.

큰딸의 출산일도 이십여일 남았고 수술은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 잠시 긴장이 풀리니 심한 몸살이 났다. 그 와중에도 메주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달았다. 아픈 몸을 일으켜 마당에 솥을 걸고 장작을 지펴 이틀 동안 서 말의 메주를 쑤었다. 청국장도 만드는 중이다. 사흘이 지나자 뜨는 냄새가 슬슬 나더니 날로 더해진다. 이제야 겨울준비가 끝난 것 같다.

메주를 잘 띄우려면 정성을 다해야 한다. 콩도 좋은 것으로 골라야 하고 잘 삶아야 한다. 메주를 만들어 겉을 잘 말려 서로 닿지 않게 놓고 온도조절과 통풍에 신경 써야 한다. 그때부터 여러 종류의 곰팡이가 생긴다. 백태가 된장으로 발효되기까지는 결코 순탄치 않은 많은 일을 겪어내야만 제 맛을 낼 수 있다. 사람의 삶도 그러하리라.

늙으면 냄새가 난다고들 한다. 모두 그런 줄 알았다. 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알았다. 팔순을 훌쩍 넘기고 말기암으로 생을 마감하면서도 아버지의 냄새는 향기였다. 인생을 잘살아야 함을 그때 깨달았다. 부패한 냄새로 곁에 있으면 멀미가 나는 사람이 있고 굴곡진 삶도 잘 발효시켜 늙었음에도 냄새가 좋아 그 곁에 마냥 머물고 싶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마루 한쪽에 놓여 있는 메주들은 짚을 깔고 덮고 있다. 어제의 냄새보다 오늘의 냄새가 더 짙다. 저들도 속에서부터 뜨느라 고통을 감내하는 중일게다. 내게도 넘어야 할 험한 산들이 있으나 내색 없이 속으로 삭이며 힘든 시간이 조용히 흘러가게 두고 있다. 그러다 보면 새 생명은 비릿한 젖 냄새로 안겨올 터이고 암을 이겨낸 이국 청년의 새로운 삶은 향기로움과 함께 찬란하게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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