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弔花)가 운다
조화(弔花)가 운다
  • 김기원<편집위원·청주대 겸임교수>
  • 승인 2015.12.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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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김기원

‘너무들 하십니다 그려/ 이 몸이 분명 주인이거늘/ 내게는 눈길 한 번 아니 주고/ 제 몸에 드리워진 리본을 보며/ 힘깨나 쓰는/ 정치인 기관장 사업가들의/ 이름만 보시는 갗

필자의 시 ‘조화(弔花) 1’의 전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조화도 어엿한 꽃이건만 향기도 있고 자태도 곱고 멋진 이름도 있는 분명 꽃이건만 사람들이 눈길 주지 않고 리본에 쓰여진 보낸 이의 이름만 봅니다. 빈소를 3일씩이나 지켰는데도 고인이 장지로 떠나면 쓰레기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비련에 조화가 웁니다.

각설하고 꽃은 아름다움과 향기의 상징이며 축·조의 대명사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존경하는 이에게 꽃을 바쳐 사랑과 존경을 표하고 고인의 영정 앞에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바쳐 천당과 극락왕생을 기원하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행위의 최고봉에는 늘 꽃이 있었습니다. 생일날과 결혼기념일엔 꽃바구니를, 졸업식·시상식·취임식 등에는 축하의 꽃다발을 보내 기쁨을 함께 합니다. 허나 조화에는 보내는 이의 이름만 있을 뿐 꽃은 여벌입니다.

오는 순서대로 놓이는 게 아니라 보낸 이의 신분에 따라 놓이는 장소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고관대작이나 행세하는 집안의 상가에는 밀려오는 조화를 감당하지 못해 보낸 이의 이름표만 떼어내고 되돌려 보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역임하다 중도 하차한 유승민 국회의원의 부친상 때 박근혜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지 않은 것을 두고 정치권은 물론 언론과 호사가들로부터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습니다.

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현 정부 실세 장관이 보낸 화환 앞에서 ‘안 보내는 데가 없구먼’하는 넋두리가 언론에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상가와 빈소에 조화가 언제부터 등장했는지, 맨 처음 누가 어떻게 보냈는지는 알 길은 없으나 조화문화의 허와 실에 대하여 깊이 성찰할 때가 되었습니다.

먼저 대통령의 조화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언제부터 보냈고, 무슨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보내는지,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국민에게 밝혀야 합니다. 정부와 지자체는 물론 각급 산하기관들도 국민의 혈세로 보내는 축·조화 실태를 조사해 문제점이 없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사실 대다수 서민들은 조화보다 조의금을 선호합니다. 조화는 실속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치워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기 때문이죠. 같은 장례식장인데 조화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많은 빈소가 있는가 하면 달랑 한 두개 밖에 없는 빈소도 있습니다. 없는 집 유가족들은 물론 이를 지켜보는 조문객들의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결혼식은 신랑 신부의 부모를 보고 오고, 장례식은 고인의 자식들을 보고 온다고 합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 거리지 않는다’라는 옛말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관혼상제 때 이웃과 친지들이 십시일반으로 내는 게 부조입니다. 보낸 이의 이름만 있는 조화는 허례이지 부조가 아닙니다.

돈 많은 자들이 돈지랄하는데 무슨 참견이냐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조화로 생업을 영위하는 업자들이 조화가 무슨 죄가 있어 그러냐고 따지면 이 역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 쓰고 버리는 조화문화는 재고되어야 합니다. 공론화해 사회에 위화감을 조성하는 과시형 조화문화와 정치적 의도나 국민의 혈세로 생색을 내는 조화문화는 퇴출시켜야 합니다.

애통함도 없고 부조도 아닌 조화문화에 경종을 울립니다.

들리나요? 오늘도 수많은 주검 앞에 울고 있는 조화들의 흐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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