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5.12.2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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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영숙

‘춘마곡 추갑사.’ 봄에는 마곡사의 꽃이 좋고, 가을에는 갑사의 단풍이 절경이라는데 우리는 때아닌 겨울 한가운데 공주시 사곡면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있는 마곡사를 찾았다.

마곡사는 백제 의자왕 시절 신라의 자장이 절을 완공하고 설법할 때 사람들이 삼(麻)같이 빽빽하게 모여들었다고 마곡이라는 설과 신라 무선대사가 당나라 마곡보철 선사에게 배웠기 때문에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마곡이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알싸한 바람이 목덜미를 훑는 12월 중순. 휴일을 맞아 간단한 여행 가방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공주 유적 답사를 목적으로 떠난 첫 번째 기행지는 마곡사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장교를 살해한 후 잠시 삭발하고 은신했던 곳이기도 해서 1차 목적지로 삼았다.

주차장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돌아서는데 기름질한 음식 냄새가 자욱하다. 그야말로 입구부터 마곡사를 위에 두고 생업을 이루는 사하촌(寺下村)이다. 문득 1936년대 보광사를 중심으로 한 김정한의 단편소설 ‘사하촌’이 떠오른다. 즐비한 상점을 지나 절대 저렴하지 않은 입장료를 내고 터덜터덜 마곡사 입구로 들어서는데 채소와 약초를 파는 아낙네들이 즐비하다. 동안거 백일기도 안내 현수막 맞은편에 ‘백범 명상길’이라는 현수막이 마주한다. 종교와 자본의 묘한 관계 방정식을 보며 상념에 잠긴다.

백범은 이 길을 거닐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가 잠시 머물던 백범당에 이르자 선생이 좌우명으로 삼던 휴정 서산대사의 선시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족자가 눈에 들어온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걷지를 마라//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뒷사람들의 이정표가 될지니//

그 앞에서 플래시를 터뜨리고 무슨 문학회니 하면서 현수막을 두르고 족적을 남기느라 분주하지만 정작 우리는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고 있는가. 누구 말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살자니 고통스럽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살자니 허망할 뿐이다. 고통과 평안을 눈금 재며 내려오는 길, 가장 낮은 자세로 땅과 하나 되어 민낯과 알몸으로 살아가는 빡빡머리 개미에게서 잃어버린 정글의 초상을 읽는다.

언제쯤 자본의 기름 냄새 가득한 세상에서 페르소나 없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백범 김구 선생의 발자국을 따라 내려오는 길, 손질한 도라지를 들고 애처롭게 바라보는 아낙의 눈에 붙들려 도라지 한 봉지를 샀다. 허연 속살을 매끄럽게 드러낸 도라지에 홀려 입에 넣고 깨물었더니 씁쓰름한 맛이 혀를 마비시키며 강하게 뇌파를 자극한다. 내용과 형식의 배반이다.

이 세상은 내용보다 형식이 거대한 가면무도회장이다. 본질과 형상을 꿰뚫는 심오한 통찰만이 진리를 찾아내며 이 땅에 바른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 구부러진 길을 거닐더라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일심(一心)의 발자국만 남긴 백범처럼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는 길도 이 시대의 참된 순례자로 잘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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