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풍경 `쐐기벌레'
지금은 없는 풍경 `쐐기벌레'
  • 신준수 <시인·숲해설가>
  • 승인 2015.12.22 1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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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데이 밥상<산골짜기 옛말>
▲ 신준수 <시인·숲해설가>

엉거주춤 서 있는 자귀나무에서 노랑쐐기나방 고치를 보았습니다. 달걀모양입니다.

갈색 바탕에 흰색 줄이 규칙은 없지만 규칙 같습니다. 등고선 같기도 하고, 물안개 피어나는 川 같기도 합니다.

저마다 모양과 무늬로 햇빛을 채록하는 것은 저들의 오랜 습관. 언뜻 보기에는 다 같은 문양처럼 보이지만 애벌레에서 번데기가 될 때 자리 잡는 방향에 따라 무늬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종잇장처럼 얇은 생각들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열리고 오소소 진저리가 처집니다.

쐐기벌레,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온몸이 따끔거립니다.

고라데이 아이들은 쐐기벌레가 자라서 나방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벌레가 날씨가 추워지면 집을 짓고 들어가 살다가 봄이 되면 다시 나와 쐐기벌레가 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완전변태니, 불완전변태니 하는 말을 모르던 시절입니다.

지금도 깨금나무를 보면 쐐기벌레가 있는지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잎을 뒤집어 봅니다.

어릴 적 깨금나무에 유독 쐐기벌레가 많았습니다. 벌레의 몸에 오색 반점이 아주 예뻤습니다. 그러나 온몸을 덮은 털, 그 털이 밑도 끝도 없이 싫었습니다.

깨물면 혹부리 영감이 놀라서 도망쳤다는 딱, 소리가 신기 했고, 씹을수록 고소한 깨금도 좋았습니다. 깨금나무 잎 사이로 팔을 뻗으면 손등 팔 여기저기 셀 수 없을 만큼 독침이 박히곤 했습니다. 푸세푸세 성성한 털, 그 털에 스치면 쇠꼬챙이보다 더한 통증으로 온몸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독침하나 몸에 박힌 것처럼 얼얼하고, 가렵기는 또 얼마나 가렵던지.

쐐기벌레에 쏘이면 얼른 침을 발랐습니다.

할머니는 사람 독이 세상 어떤 독보다 독하다 했습니다. 그러니 어떤 상처든 먼저 침을 바르면 다른 독을 이길 수 있다 했습니다.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연방 신음이 흘러나왔습니다. 침을 바르고 손바닥으로 탁탁 상처부위를 내려치면 잠시라도 가려움과 통증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쐐기벌레가 늙으면 허연 물을 토하고, 그 토한 물이 거품처럼 모여서 고치를 만드는데 더러는 그 허연 물을 받아서 상처에 바르기도 했습니다.

독사한테 물렸을 때, 독사의 독을 치료약으로 사용하듯 쐐기벌레가 토해 낸 물은 사람의 침보다 더 효험이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어린 시절 쐐기나방 고치를 일부러 따러 다녔습니다. 어머니도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마다 쐐기나방 고치가 보이는 대로 갈무리했고, 아버지도 쇠죽 솥에 불을 지피면서 쐐기벌레 고치를 갈무리했습니다.

겨울철 입술이 터서 쩍쩍 갈라질 때 쐐기벌레 번데기를 구워 그 안에 웅크린 번데기를 꺼내 먹으면 낫는다는 것을 고라데이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아기들이 유독 침을 많이 흘릴 때도, 어린 아이들 경기 치료에도 효험이 있다 하였습니다. 고라데이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입술이 갈라지지 않고, 침을 흘리지 않아도 쐐기벌레 고치를 눈에 띄는 대로 갈무리해 두었습니다.

한나절 산을 헤매며 구한 쐐기벌레 고치를 누구네 화롯가에 오종종 둘러앉아 바삭, 쫄깃하도록 구워먹었습니다. 지금은 없는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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