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
책벌레
  • 이은희<수필가>
  • 승인 2015.12.2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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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은희

12월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마음이 먼저 바쁜 달이다.

직장에서든 각종 모임에서든 한해의 결과물을 내놓느라 분주하다.

쉴 틈 없는 바람에 낙엽이 뒹굴듯 휩쓸리다 육신은 녹초가 되어 물먹은 솜처럼 드러눕기 일쑤다. 지금 내 머릿속은 새해의 예산을 짜느라 숫자로 가득하다. 자신의 한해 결산은 정작 꿈도 꾸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간다.

한마디로 몸과 정신이 따로 노는 끄트머리 달이다. 돌이켜보면 매년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 정녕코 12월은 할 일이 많아 책상에 앉아 책을 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러니 마음에 품은 책벌레가 어디 가능키나 하겠는가. 그러니 나에게 정한 글을 주지 않는 것도 당연한 결과다. 오죽하면 13월이 있으면 좋겠다고 푸념을 늘어놓겠는가.

책상 위에 나날이 책들이 쌓인다. 집으로 배달된 계간지와 문인들이 보내 준 서적이다. 책들이 켜켜이 쌓인 만큼 내 마음의 무게도 따라 중량감을 더한다. 책을 읽고 답장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시선과 마음은 굴뚝같으나 진드근히 자리에 앉아 책을 정독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오랜 친구를 만나 나의 심정을 말하니 우선 마음을 비우란다.

스스로 마음의 짐을 짊어지지 말라는 소리다. 지인은 “여유가 있을 때 차고앉아 읽으면 되지 무얼 걱정을 사서 하느냐.”는 것이다. 그녀의 말도 맞는 성싶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면서 마음에선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돌아보니 깔끔한 성격 탓도 있다. 매사에 앞에 놓인 것들을 정갈히 정리 정돈하기를 좋아한다. 또한 일의 순위랄 것도 없지만, 먹고사는 일 먼저니 작가란 업은 뒷전이 되고 마는 격이다.

친구의 말대로 언제쯤이면 ‘마음 비우기’를 잘할 수 있으려나. 온갖 상념에 들다 결국,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쌓인 책들을 바라보며 아니 책을 펼치기 전에 본원을 되짚는다. 문학가라면 먼저 무엇을 떠올려야 하는가. 문학에 관한 한 내가 아는 알량한 지식을 불러내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갖는다.

중국 근대문학의 개척자인 루쉰은,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주는 곳은 문학밖에 없다.”라고, 또 “수필이란 사색을 통해 발견된 삶의 진실이다. 진실을 삶을 일깨우는 수필이야말로 존재에 대한 통찰과 자성의 문학이다.”라고 하였다.

현재 문학을 떠난 나를 상상하기 어렵다. 나의 정신적 고향은 문학이다.

그런데 나의 현실은 정신이 없는 형해(形骸), 바로 그것이다. 육신은 있으나 정신이 떠도는 격이다. 공중부양 하는 정신과 바닥이 난 밑천을 채우려면, 애써 책벌레 흉내라도 내야만 한다.

문득 정민 교수가 허리도 못 펴고 일에 열중하던 중국 교수에게 써 주었던 글이 떠오른다.

“萬事分有定 세상일 분수가 정해있건만”

“浮生空自忙 뜬 인생이 공연히 혼자 바쁘다”

이 글을 읽은 동료 교수가 웃으며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나 또한 모든 일을 제쳐놓고 서재에 틀어박혀 책벌레 흉내를 내본다. 그리하면 존경하는 간서치(看書癡) 이덕무 모습의 절반은 닮아가려나. 글 행간에서 만난 글귀에 마음의 종소리도 울리고, 메마른 마음 밭에도 푸른 새싹이 돋아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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