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매듭을 지으며
또 하나의 매듭을 지으며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15.12.1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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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용례 <수필가>

몇 송이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 저녁. 안타까운 을미년 양의 해가 꽁지를 보인다. 해마다 이 시간이면 느끼는 감정이지만 올 연말은 유난히 더 아쉽다. 하루하루가 금싸라기 같은 보석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듯 아깝다. 바다에 지는 석양이 왜 그리 황홀하게 깊은 시선으로 지는지를 알게 하는 시간이다. 겸손하고 신중한 시간을 가지라는 전언을 읽는다.

내년이면 이순으로 들어선다. 내 인생 오십 고개를 마무리 지으면서 돌아보니 크게 이룬 것은 없지만 그동안 애썼다고 등을 토닥여 주며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아들딸 밥벌이하게 컸으니 고맙고 남편도 탈 없이 퇴직했다. 나 자신에게 칭찬 한 가지 한다면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놨다는 것이다. 누구나 살면서 후회와 가슴 벅찬 순간이 있다. 좋았던 일, 잘한 일은 잊어버리고 잘 못한 것만 더 생각이 난다. 여유롭지 못한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너그럽지 못했던 것이 불편하게 걸린다.

며칠 전 문학회 대선배님을 만났다. 선배님은 후배들에게 늘 칭찬을 하시며 후배 누구를 만나도 밥이나 차를 사주신다. 물질에 욕심을 내시지 않는다. 특별한 날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 드리면 이 나이에 무엇이 더 필요하냐며 극구 사양하신다. 가끔 얼굴 보여주는 것으로 고맙다 하신다. 노랫말처럼 늙어 가는 게 아니라 익어간다는 말, 선배님을 보면서 지는 해의 깊은 마음을 읽는다.

내 인생 오십대도 며칠 남지 않았다. 또 한 번의 매듭을 지어야 한다.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다. 혹여 넘어질까 무던히 애를 쓰며 걸어왔다. 오늘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끼니를 챙겼지만 나를 위해 밥을 지어 본 기억이 없다. 오늘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밥상을 차렸다. 그리고 요즈음 화제가 되는 영화 ‘내부자들’을 보았고 또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목욕을 갔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세신사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호사를 누렸다. 오후 시간엔 전화기도 꺼놓고 책을 보면서 뒹굴거렸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면 외로울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더없이 좋았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 써 본 시간이 얼마나 될까. 어디 시간 뿐이랴. 돈은 물론이고 나 자신을 생각하기보다는 주변을 살피다 보면 나는 없었다. 나를 위해 쓰는 돈은 최소한으로 쓰면서도 아깝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일년을 열심히 살다가 12월 어느 하루쯤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일도 괜찮은 일이지 싶다.

오늘은 나를 위해 밥을 짓고 시간을 보냈다. 그 많은 날 중에 한 날이건만 왜 이렇게 하루하루 의미를 두고 싶은지. 그냥 있어도 의미를 부여해도 같은 시간으로 가는 날들이 지금 나에겐 보석과도 같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다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나와 가족보다는 사람의 향기가 나는 여인으로 깊어지고 싶다. 겨울은 춥기도 해야겠지만 눈이 내려 하얀 세상을 만들어야 겨울답다.

계절도 계절다울 때 아름답다. 사람은 어떻게 저물어가야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답게 저물어 간다는 것 어려운 숙제다. ‘송풍다명(松風茶茗) 솔바람으로 차를 끓이니 찻잔 속에 솔숲이 없을 리 없다’는 말을 생각하며 또 하나의 매듭을 지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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