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의 사랑
피안의 사랑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5.12.1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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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도심 외곽의 전원주택, 마당엔 대추나무가 있고 담장처럼 영산홍이 곡선을 그리며 울타리를 만들었다. 반듯한 벽돌로 각을 그린 담장과 달리 포근함이 감도는 곳이다. 늘 열린 대문은 마치 간이역이라도 되는 양 누구든 스스럼없이 드나든다. 높은 담장 그리고 굳게 닫힌 대문에 진종일 돌아가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현실과는 대조적인 모습에 때론 의아할 때가 있다. 너른 마당엔 토종개가 감시카메라 역할과 주인을 대신하여 행세를 하고 있다. 대추나무 가지에 걸어놓은 새장에는 문조, 십자매 그리고 잉꼬가 초인종을 대신한다. 그야말로 이 댁은 문명이 비켜간 듯 손끝에 닿는 곳마다 예전 방식 그대로인 쉼터 같은 곳이다.

해가 길게 늘어진 오후, 주인 양반은 늘 습관처럼 어둠이 내리기 전에 새장을 현관에 들여놓는 것으로 하루일과를 마무리한다. 불타는 듯한 석양은 맑은 날씨를 예고한다고 했다. 옛 선조들이 자연현상으로 날씨를 예측하듯, 맑은 저녁 날씨에 별 이상이야 있겠는가 싶어 그날은 새장을 들여놓지 않았다.

하나 변수가 생겼다. 겨울날 별이 밝게 보이는 날이면 눈보라나 날씨가 춥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심한 행동, 아차가 사람을 잡는다고 했던가. 한파가 몰아친 간밤, 어찌하여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을 하는 걸까. 어슴푸레한 새벽 소스라치게 놀라 대추나무에 걸린 새장을 향해 달려가 보니 이미 문조는 차갑게 굳어 있었고 다른 새들 역시 서로 몸을 비비며 온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다급하게 새장을 옮겨놓아 정리했건만 널뛰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질 않는 걸 보니 놀란 새들의 가슴은 어떠랴.

이튿날 문조는 울지 않았다. 고상하고 기품이 넘치는 관상조인 문조, 짹짹 바이브레이션의 울음소리가 매력적이며 날렵한 하얀 몸매와 붉은색의 부리에 우아한 자태로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문조. 횟대 위에 한 쌍의 문조가 날아오를 것만 같아 새장을 치우지도 못하고 빈 둥지를 대추나무 가지에 여전히 걸려 있다.

문조의 또 다른 이름이 선비 새다. 예부터 선비들이 길렀다 하여 선비의 새라고 알려진 문조, 희디흰 순백의 깃털 선비의 흰 도포자락을 연상시키는 문조, 마치 이 댁의 주인양반과 닮은 골이다. 아이들을 유독 좋아하는 유한 성품의 주인양반, 문조의 아름답고 화려한 외모를 닮았고, 빨려들어 갈 것 같은 강렬한 눈빛과 곧은 성품은 문조와 흡사하다 하여 주변에서는 대쪽 같은 사람이라 한다.

문조는 같이 살던 짝이 죽으면 나머지 새도 시름시름 앓다가 곧 따라 죽는다 한다 하여 사람들은 혼자서는 못 사는 새라고도 하며 정절을 지키는 새라고도 한다. 정절(貞節)이란 그야말로 곧은 신념이다. 같은 맥락으로 절대 굽히거나 바꾸지 않는 강직한 태도를 보인 사람을 두고 대나무 같은 사람이라 하지 않던가.

대나무는 절대 휘는 법이 없을뿐더러 쪼개지면 쪼개졌지 부러지지 않는다. 대나무는 곧음이다. 선비의 정신처럼 제 본성을 굽히지 않는 것처럼 문조도 그러하다. 짝을 잃어도 곧은 신념으로 살다가 가는 것이다.

관상조인 문조 아름다운 이면에 이처럼 곧음과 신의를 간직한 새, 주인양반 자신을 닮아 애증으로 품었던 문조, 고고한 선비의 품격인 문조, 믿음과 의리를 간직한 선비 새다.

문조와 대나무 같은 주인양반, 이익을 위해서 신의를 저버리는 오늘날의 세태에 진리를 깨닫는 피안의 사랑이 아닐까.

본격적인 추위가 닥쳐오면서 그 집 대추나무에는 새들이 없다. 새들이 없으니 지저귐도 들리지 않는다. 적막이 깔린 대추나무집, 선비 새가 살던 그 집엔 고요만이 흐르고 이따금 선비의 공허한 헛기침만 담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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