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얼굴
분노의 얼굴
  • 강대헌<에세이스트>
  • 승인 2015.12.1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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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 강대헌

“분노가 가득한 세상이다. 신문기사나 사회관계망에 오른 글들에는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들이 댓글로 달리곤 한다. 영화 <베테랑>이 단숨에 천만 관객을 돌파한 데에도 분노의 공감이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송혁기 교수가 ‘마땅한 분노’라는 제목으로 한 신문에 썼던 칼럼의 첫 대목입니다.

분노라는 말을 들으니 예수의 성전청결사건이 생각나는군요.

성경의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성전 뜰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라는 기사(記事)입니다.

이런저런 흥정바치들로 시장 바닥처럼 어지럽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만들어버린 예수의 실력 행사의 논점은 “이것을 거둬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는 것이었고 이를 가리켜 ‘거룩한 분노’라고도 합니다.

위의 송혁기 교수의 칼럼 마무리는 다음과 같더군요.

“모든 존재는 자기 자리가 있게 마련이라는 말은, 입 다물고 자기 본분에나 충실하라는 가르침으로 통용돼 온 면이 있다. 그러나 모든 존재가 자기 자리를 얻을 수 있게 해주어야 진정한 정치라는 당위와 그렇지 못할 때 끝까지 비판하고 나설 수 있게 한 명분 역시 여기서 나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구난방으로 솟구쳤다 이내 소멸되며 더 큰 체념으로 이어지는 분노가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할 마땅한 자리가 어디이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마땅한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 위에서 일어나는 마땅한 분노이며 이 분노를 생산적인 힘으로 만들어갈 지혜다.”

이치로 보아 당연하다는 뜻의 마땅한이든 성스럽고 위대하다는 뜻의 거룩한이든 이러한 형용사(形容詞)들은 분노라는 명사(名詞)의 표정을 드러내려고 사용된 말일 겁니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마땅하지 않은 분노는 불편한 표정이겠죠. 적절하지 않거나, 도리에 맞지 않거나, 부당하거나, 불법적인 분노의 얼굴일 테니까요.

거룩하지 않은 분노는 옹색한 표정이겠죠. 고상하지 않거나, 위엄이 없거나, 당당하지 못하거나, 고결하지 않거나, 기품이 없는 분노의 얼굴일 테니까요.

얼마 전에 마땅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은 분노의 얼굴을 보여준 사례가 있었죠. 탕수육을 시켰는데 간장 종지가 모자라게 나와서 몹시 분노했다는 한 신문의 칼럼 말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신문에서 그런 기사를 써서 놀랐습니다”라는 중국집 주인의 반응을 게눈 감추듯 넘겨버려서는 안 될 겁니다.

마땅한 분노의 얼굴과 거룩한 분노의 얼굴이 하염없이 그립기도 하지만 아무렴 예쁜 민낯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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