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유감
첫눈 유감
  • 최준 <시인>
  • 승인 2015.12.10 18: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 최준

충북 음성군의 면 소재지에서 열린 노래자랑을 구경 갔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무대를 설치하고 앞에 늘어놓은 의자들에는 면민(面民)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 탓에 썰렁할 법도 했지만 해마다 이어온 노래자랑은 면민들의 흥겨운 축제였다. 농촌 현실을 반영하듯 의자에 앉아 있는 분들은 거의가 다 노인들이었다. 농사 일손을 거둔 농한기여서인지 긴장 풀린 여유와 따스한 커피를 나눠 마시는 인정이 매운바람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각 마을을 대표해서 참가한 출연자들이 노래하는 사이사이에 준비한 경품들을 나눠주기도 하면서 들뜬 소요 속에 진행된 행사는 어두워질 무렵에야 끝이 났다. 뒤편에 서서 행사를 지켜보다가 운동장을 나서는데 교문 앞에 푸른색 트럭이 한 대 서 있었다. 트럭에는 눈삽들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청년 두 사람이 돌아가는 이들에게 눈삽을 일일이 나눠주었다. 앞에서 눈을 마주친 청년이 내미는 눈삽 하나를 얼떨결에 받아들고 돌아왔다.

출입문 문가에 눈삽을 기대 세워놓고 생각했다. 올겨울에 눈삽을 쓸 일이 있을까. 사는 고장에서 몇 개의 겨울을 보냈지만 내륙이어서인지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았었다. 치워야 할 정도로 많은 눈이 한 번만이라도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올해보다 내년에 더 심각할 거라는 가뭄 해갈에도 도움이 좀 되었으면 싶었다. 출입문을 열고 집을 드나들 때마다 눈삽에 눈길이 가 멎곤 했었는데 며칠 전에 그걸 쓸 일이 생겼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 오랜 습관이어서 그날도 정오 무렵에야 잠에서 깨었다. 냉수를 한 컵 마시고 주변을 산책하려 문밖을 나서는데 아뜩하게 눈이 부셨다. 마술처럼 세상이 설원(雪原)으로 바뀌어 있었다. 집 앞의 2천5백 평이나 되는 넓은 밭은 올가을까지 복숭아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집주인이기도 한 칠순을 넘긴 어르신이 혼자서 땀 흘려 일군 과수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과수원 일이 힘에 부치신다며 인삼을 재배하는 이들에게 세를 주었다. 그 사람들이 장비를 동원해 이틀 만에 과수원을 허허벌판으로 만들었다. 밀 씨앗을 거기 뿌려놓은 게 싹을 틔워서 어제까지만 해도 밭은 푸른 초원이었다. 그런데 밤사이 내린 눈으로 청청하던 밀싹들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가볍게 눈발이 날린 적이 한두 번 있었지만 폭설이라 해도 될 만큼 많은 첫눈이었다.

마당을 밟아보니 적설은 발목을 지나 정강이까지 차올랐다. 큰길까지 걸어나가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돌아서서 눈삽을 집어들고 눈을 치웠다. 토끼 길을 내느라 한참 숨 가빴다. 눈을 한 삽 떠서 들면 묵직한 느낌이 두 팔에 전해졌다. 둘레 산들에는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가지가 부러진 설해목(雪害木)들도 있을 것이었다. 지나다 보면 드문드문 눈에 띄었던 아랫마을의 비닐하우스들은 괜찮을까.

외출했다가 어두워진 저녁에 돌아오는데 집 근처 큰길을 봉고차가 가로막고 서 있었다. 눈에 익은 차여서 살펴보니 집주인 어르신이었다. 운전해서 돌아오시다가 눈길에 차가 미끄러진 거였다. 봉고차에 길이 막혀버린 맞은편 차로에서 내린 분들도 합세해서 용을 써 보았지만 헛바퀴만 돌았다. 겨우겨우 길가로 돌려세워 놓고는 어르신과 걸어서 왔다. 화등잔만 한 불을 밝힌 제설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제설차 꽁무니에서 눈보라가 일었다.

실내에 지펴 놓은 연탄난로에 곱고 시린 손을 쬐었다. 또 하나의 겨울이 시작되었구나. 때 이른 폭설은 산짐승들에게 큰 고난이겠지. 하지만 겨울이 춥고 배고픈 게 어디 산짐승들뿐일까. 우리 사는 세상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존재들이 너무도 많다. 도움의 손길이 없이는 겨울이라는 가파른 언덕배기를 넘기가 어려운 목숨들이 멀고 가까이에서 몸 웅크리고 있다. 첫눈 내린 정적 속으로 측은지심과 베풂의 온천수가 흘렀으면 좋겠다. 겨울이 죽음처럼 두려운 그들의 마음이 삼동(三冬)에도 얼어붙지 않는다면 더욱 다행이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