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꾸자 시위문화
바꾸자 시위문화
  • 김기원<편집위원·청주대 겸임교수>
  • 승인 2015.12.0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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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김기원<편집위원·청주대 겸임교수>

지난 5일 열린 2차 민중총궐기 집회가 물리적 충돌없이 끝났다. 11월 14일 열린 1차 집회와 달리 쇠파이프와 물대포 없는 시위문화의 새 이정표를 썼다.

시위대는 가면놀이와 풍물패 공연 등을 하며 서울시청 앞에서 서울대병원까지 평화행진을 했고, 경찰도 이에 화답하듯 교통 불편 최소화에 주력했다.

역시 민심은 무서웠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쇠파이프와 물대포를 주고받는 무지막지한 전쟁을 한단 말인가'라는 국민의 원성과 자성이 하늘을 찔렀다. 공권력이 불법집회와 폭력시위를 엄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아서가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불법과 폭력을 용인할 수 없다는 국민들의 무언의 압력이 시위대와 경찰 모두에게 무겁게 와 닿은 결과였다.

그렇다. 그 어떤 공권력도, 그 어떤 시위대도 국민과 민심 위에 군림할 수 없다. 공권력은 주권자인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국민이 갑이지 결코 공권력이 갑이 아니다. 국민의 안위가 위협받고, 민주주의 가치가 훼손되었다고 여길 때 국민들은 분연히 일어나 집회를 하고 시위를 했다.

3선 개헌 반대, 유신 반대, 군부독재 반대, 호헌 반대 데모가 대표적인 예다. 그때는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만 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가던 시절이라 시위대가 법을 어겨도, 보도블록을 깨서 폭력을 행사해도 국민들로부터 암묵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순사의 시대도, 워커의 시대도, 투사의 시대도 아니다. 국민의 선택으로 진보정권을 세우기도 하고 보수정권을 세우기도 하는 유권자의 시대이다. 취객이 파출소에서 소란을 피우는 공권력 수난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과거 권위주의 시대 때 시위문화로는 국민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자신들의 주의·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사회단체와 이익단체들의 집회와 시위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번 1차 민중총궐기 집회의 이슈는 노동 개악 저지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였다. 2차 집회에서는 그 두 가지 이슈와 1차 집회 때 경찰의 물대포로 쓰러진 백남기 농민 쾌유기원과 공안탄압 규탄으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민노총은 노동자의 권익신장을 목적으로 하는 이익집단의 하나다. 민노총이 조합원의 기득권 보호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벌이는 집회와 시위 자체를 제 3자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 단지 노동문제 이외의 정치세력화와 폭력시위를 우려할 뿐이다. 공권력이 헌법과 법령의 범위 안에서 불법과 폭력을 예방하고 방어하는 임무수행 또한 가타부타할 수 없다.

다만 국민의 지팡이가 아닌, 정권의 지팡이로 기능하는 것을 경계할 뿐이다. 국민의 불신과 원성을 사는 공권력도, 민심에 역행하는 집회와 시위도 모래 위에 지은 성과 같다. 공권력도 정권에 과잉충성하고, 시위대를 자극해 폭력진압을 일삼고, 알량한 권한으로 국민에게 갑질하면 민심이 이반되어 무너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집회와 시위도 공익과 시대정신에 부합되지 않으면 메아리 없는 공염불이 된다.

아무튼 집회와 시위는 민주주의의 약이자 독이다. 건강한 집회와 시위는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약이 되지만 시위를 위한 시위나 상생을 저해하는 독선적 시위는 공동체를 좀먹는 독이 된다.

민초들이여 불의와 해악과 억압이 있으면 언제든 집회와 시위를 하라. 하되 왜 하는지, 왜 그리해야 하는지 먼저 국민에게 설명하고 공감을 얻으라. 그리하면 복면을 쓰지 않아도, 쇠파이프를 들지 않아도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국민의 눈높이로 시위문화를 바꾸자. 그래야 약자도 살고 정의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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