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풍에 올린 돛대 용두사지 철당간
준풍에 올린 돛대 용두사지 철당간
  • 박상일<청주문화원 수석부원장>
  • 승인 2015.12.03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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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박상일<청주문화원 수석부원장>

청주의 원도심에서도 그 중심에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은 주변에 소재한 많은 문화재들 중에서도 품격이 다른 국보이다.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별칭하게 된 것은 무심천 물에 떠있듯이 자리한 청주읍성이 배 모양인데다 철당간이 돛대처럼 높게 솟아 있음에 기인한다. 시내의 유일한 국보일 뿐만 아니라 청주의 상징적 존재이다 보니 옛 문헌에도 빠짐없이 등장하고 청주의 명승 8곳을 선정한 서원팔경에도 들어있다. 그러나 먹고살기 힘들고 개발만이 최우선 과제였던 시절에 철당간은 옆 건물의 굴뚝으로 오인될 정도로 방치되었고 도심개발을 위해 상당공원으로 이전이 추진되는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위기의 철당간을 구한 것은 바로 청주시민들이다. 70년대 이후 빌딩이 들어서고 건물에서 내뿜는 매연과 철당간을 둘러싸고 진을 친 포장마차, 차량통행으로 인한 안전문제 등 심각한 위기에 처해지자 시민들이 일어났다.

국난에 의병을 일으켜 지역을 수호했듯이 청주시민들이 한마음이 되어 철당간 보존에 앞장섰다. 시민모금을 통해 인접한 건물을 매입 철거하여 광장을 넓히고 정비한 일은 청주만이 할 수 있었던 쾌거였다. 최근 청주의 향토사학자 17인이 공동으로 ‘준풍에 올린 돛대’라는 책을 펴내고 출판기념회와 학술회의를 열었다. 용두사지 철당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전국의 당간을 일제히 조사하고 집필하여 책으로 엮은 것인데 대부분 전문학자가 아닌 분들이 참여하여 이처럼 좋은 책을 냈으니 또한 경탄할 일이다.

용두사 철당간은 당간기에 ‘준풍(峻豊) 3년’에 건립하였음을 명기하고 있다. 준풍은 고려 광종의 독자적인 연호로서 그 3년은 광종 13년(962)에 해당된다. 용두사는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법등을 밝히고 있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신문왕 5년(685) 청주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경덕왕 18년(759) 서원경으로 승격시켰는데 이로써 청주에도 불교가 크게 융성하여 용두사와 같은 큰 사찰들이 청주 곳곳에 세워졌다. 철당간은 청주호족인 청주김씨 예종·희일 형제의 발원에 의해 세워졌고 30단의 철통으로 60척의 높이였다.

이후 용두사는 읍성 축성으로 폐사되고 철당간 홀로 천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절터에 남은 당간을 보면서 그 위용에 감탄하고 행주형(行舟形)의 청주가 순풍에 돛단 듯이 발전하기를 바라며 세운 구리돛대(銅檣)로 해석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절은 폐사가 되었지만 돛대는 남아 있으며 높이가 10여 길이다. 세상에 전하거늘 처음 주(州)를 설치할 때 술자(術者)의 말에 따라 이것을 세워 배가 가는 형국을 나타내었다’고 했다.

조선초기의 문장가인 이승소는 충청도관찰사로 와서 철당간을 보고 시를 지었다. ‘우뚝 서서 백 자나 높이 솟았으니/ 오가는 사람이 방황하는 것 같다 하여/ 누가 구리 기둥을 만계(蠻溪) 위에 옮겨다 세웠는고/ 한나라 동산의 금줄기인가 싶구나/ 뿌리는 깊이 박혀 지축에 이었고/ 꼭대기는 구름 밖에 치솟아 은하수를 꿰뚫었네/ 옛사람 이런 세운 뜻이 없지 않으니/ 큰 고을과 더불어 한 지붕을 진압함이라네’라고 당간의 위용을 표현하였다.

본래 30단이었던 철통이 20단만 남아 있는 지금의 모습도 대단하지만 주위에 단층집만 있었던 옛날 하늘 높이 솟은 60척 철당간은 구름을 꿰뚫을 만큼 장대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용두사도 청주읍성도 모두 사라진 오늘날 철당간의 역사적 의미는 남다르다. 천년의 모진 풍파를 견뎌온 무쇠당간, 준풍에 올린 돛대에 이제라도 주성을 부활하고 돛을 달아주는 것 또한 시민의 몫이며 청주시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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