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의 분기점 죽령 고갯길 이야기
역사와 문화의 분기점 죽령 고갯길 이야기
  •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5.12.02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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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죽령은 문경새재, 추풍령 등과 같이 소백산백 줄기에 자리한 큰 고개들 중 가장 위쪽에 위치한 고개이다. 소백산맥에서도 1000m가 넘은 연화봉과 도솔봉 사이의 잘록하게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때 죽죽(竹竹)이란 사람이 닦았다고 해 죽령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런데 죽령이라는 이름 외에도 바람, 소낙비, 도둑 셋이 거세다고 해서 삼재령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풍치, 길손, 주막 인심 세 가지가 좋다고 해서 삼풍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경북과 충북을 가르는 이 고개는 조선시대에는 영남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고 영주 풍기를 거친 영남의 수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고개를 넘었고 때로는 과거에 낙방해 쓰라린 가슴을 안고 다시 고개를 넘어오는 선비들의 쓸쓸한 발자국이 남아 있는 듯하다.

죽령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아달라왕 5년(158년)에 이 죽령길이 열렸다고 기록되고 있으며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는 경계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해 거칠부 등으로 하여금 죽령 이북의 10여 고을을 빼앗도록 했고 삼국 통일 직전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장군이 전쟁에 나가면서 ‘죽령이북의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할 정도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반대로 죽령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신라의 김유신은 중원 땅(충주)에 삼국통일 기념탑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 고갯길로 고구려 군사들이 넘어다녔고 잃었던 땅을 되찾은 신라군과 견훤을 물리친 고려의 왕건, 나라를 몽땅 바친 경순왕도 눈물을 흘리며 죽령을 넘어 개성으로 갔던 역사의 산증인 바로 죽령이었다. 계속해서 조선시대 선비들과 물자를 나르는 봇짐장수 등짐장수 등 수많은 민초들로 붐비던 고갯길로서 주막과 마방 등이 있었으며 지나가는 길손들의 안녕과 금의환향을 기원하는 산신당 등도 자리하고 있었다. 이 땅의 민초들이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하며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고갯길이 바로 죽령이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동쪽으로는 영주 봉화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월악산 금수산이 남쪽으로는 소백산 일대 첩첩산중이 펼쳐진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연화봉, 비로봉, 국망봉 등이 웅장하게 서 있다. 예전부터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 길이라는 말처럼 오르내리기가 힘든 고갯길이었지만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고 또 최근에는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 그야말로 ‘옛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최근에 ‘죽령옛길’ 오솔길을 복원해 놓고 있어 걷기 열풍과 더불어 지역 문화와 고갯길 문화의 특색을 살리면서 다시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래전 한 국가나 지역의 경계를 이루는 중요한 장소이며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온 중요한 분기점의 역할을 했던 죽령고개가 이제는 사람이 서로 만나고 헤어질 때 정을 나누었던 장소가 되길 바란다. 오고 가는 길손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땀을 씻고 쉼과 여유의 공간이 되고 행복을 나누고 전해주는 귀한 곳으로 거듭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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