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첫눈
  • 김태봉<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11.3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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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사람이 살면서 만나는 기후 현상 중에 첫눈만큼 사람을 설레게 하는 것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늦가을 땅은 낙엽이 서리에 엉키고 사람 발에 밟히고 하여 스산하면서도 지저분한 느낌을 주고 고개를 들어 보면 나뭇잎은 모두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황량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지저분하고 스산하고 황량한 늦가을 분위기를 단박에 전혀 다른 느낌의 분위기로 바꿔 버리는 것이 바로 첫눈이다. 지저분한 낙엽으로 칙칙한 느낌이던 땅은 새하얀 눈이 쌓여 졸지에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모습으로 둔갑하고 나뭇잎 하나 달리지 않아 황량하던 나뭇가지에는 갑자기 하얀 눈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이숭인(李崇仁)은 어느 해 첫눈을 산속에서 만났다.
 


첫눈(新雪)



蒼茫歲暮天(창망세모천) : 세모의 하늘 파랗고 아득한데

新雪遍山川(신설편산천) : 첫눈이 산천에 두루 내리네

鳥失山中木(조실산중목) : 새는 산 속 둥지를 잃고

僧尋石上泉(승심석상천) : 스님은 바위 위의 샘을 찾는다

饑鳥啼野外(기조제야외) : 굶주린 새들은 들판에서 울고

凍柳臥溪邊(동류와계변) : 얼어버린 버드나무 개울가에 누웠네

何處人家在(하처인가재) : 어디쯤에 인가가 있는가

遠林生白煙(원임생백연) : 먼 숲 속에 흰 연기 피어오른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초겨울의 하늘은 가리는 나뭇잎 하나 없이 파랗게 아득히 탁 트여 황량한 모습이다. 아무것도 없던 초겨울 하늘에 갑작스럽게 귀한 손님들이 나타났다. 그것도 무더기로 나타났는데 다름 아닌 그해 겨울들어 처음 내리는 눈이었다. 느닷없이 공중에 나타난 첫눈은 이내 땅으로 내려앉았다. 메마른 낙엽만이 나뒹굴어 쓸쓸했던 대지는 이곳저곳 할 것 없이 금새 순결한 은색 옷으로 갈아입어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연출하였다. 특히 산 속은 나무며 바위가 순식간에 눈에 뒤덮여 무차별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새는 자기 둥지가 있는 나무를 잃어버렸고 절 안의 우물마저 눈에 묻혀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바위 꼭대기 샘물을 찾아야만 했다. 먹이가 눈에 묻혀버려 굶주린 새들은 들 밖에서 울부짖었다. 갑자기 눈덩이를 뒤집어쓴 버드나무는 눈 무게를 못 이겨 그만 냇물 가로 쓰러지고 말았다. 사람 사는 집도 눈 속에 파묻혀 찾을 수 없는데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보고 겨우 알아낼 수 있을 뿐이다. 모두가 눈에 묻혀 버린 것이다.

첫눈이 오면 사람들은 설레는 기분을 느끼기 쉽지만 기실 첫눈은 꼭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황량한 허공을 일순간에 하얀 꽃으로 수놓고 삭막하고 지저분한 대지를 순식간에 순결한 설국(雪國)으로 변모시키는 낭만적인 첫눈이지만 대지 위에서 생명을 영위하는 생명체들에게 첫눈은 큰 재앙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첫눈은 사람으로 하여금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깨닫게 하는 가장 선명한 자연현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첫눈은 설렘이면서 동시에 경외(敬畏)인 것이리라.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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