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천변의 불가사의 정북동토성
미호천변의 불가사의 정북동토성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 승인 2015.11.19 19: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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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청주시의 북쪽을 가로지르는 미호천은 그 양편에 충북 최대의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청주시에서 브랜드로 정한 ‘직지쌀’이나 ‘청원생명쌀’ ‘오창쌀’ 그리고 진천의 ‘생거진천쌀’ 모두 따지고 보면 상표만 다를 뿐 미호천 들녘에서 나는 쌀이다. 청주는 분명 미호천과 그 지류인 무심천을 젖줄 삼아 형성된 도시이다.

그리고 청주사람은 미호천변의 너른 곡창지역에서 나는 쌀과 그 언저리의 오곡백과를 식량으로 삼아 살아왔다. 미호천과 무심천이 만나는 ‘까치내(鵲川)’의 동쪽 들판을 ‘팔결들’이라 한다. ‘팔결’은 조선시대의 조세제도에 따른 8결의 논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으로 이곳이 곡창지대였음을 보여준다. 그 팔결들 한복판에 정북동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대부분 산에 쌓은 산성이다. 평지에 자리하는 성곽들은 한 왕조의 도성이었거나 고려시대 이후의 읍성 또는 영성들로 수적으로 그리 많지는 않다. 정북동토성은 넓은 들판 한가운데 축조된 네모난 토성이다. 마치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이 압록강에 인접한 네모난 성이고 평양 천도 후에 도성이었던 안학궁성도 역시 대동강을 끼고 있는 네모난 성이다. 그리고 백제의 수도였던 서울의 풍납동토성 역시 한강변에 축조한 네모난 성이다. 정북동토성은 이들과 흡사하게 미호천변에 네모난 모양으로 축조하여 도성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런데 이 성에 대한 문헌기록은 거의 없다. 조선의 각종 지리지에 나타나지 않고 일제강점기에 전국의 유적을 비밀리에 조사하여 집대성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영조 20년(1744)에 상당산성의 승장 영휴(靈休)가 지은 「상당산성고금사적기」를 보면 후삼국시대에 견훤이 궁예가 차지하고 있는 상당산성을 빼앗고 작강 즉 까치내 옆에 토성을 쌓고 창고를 지었다는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 미호천 들녘에서 수확한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성이었다는 것이다.

정북동토성은 거의 정방형에 가깝다. 둘레는 총 655m로서 동벽은 180m 서벽과 북벽이 160m 남벽이 155m이며 남-북 방향이 약간 길다. 성벽 높이는 4m에 이른다. 사방에 성문이 있는데 남·북문은 성벽이 좌우에서 어긋나게 만든 옹성 구조를 보여준다. 성벽은 단면이 사다리꼴로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으며 내·외벽의 기울기가 약 75°의 경사를 보인다. 4곳 모서리 부분은 약간 높고 바깥으로 돌출되어 치성 혹은 각루의 시설이 있었던 듯하다.

발굴을 통해 성벽 안팎으로 나무기둥을 세워서 내부를 다지는 판축기법으로 축조된 것이 확인되고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대개의 성곽은 하천을 자연 해자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정북동토성은 성벽 밖에 인위적인 해자를 갖추었다.

정북동토성은 평지에 축조한 방형성곽인 점으로 보아 지방정치세력의 거점으로서 청주의 고대역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유적이며 인구 85만의 오늘날 청주 도시가 형성되는 출발점에 있음이 틀림없다. 최근에 흥덕구 송절동의 청주테크노폴리스 부지에서 약 500채의 집터가 밀집된 3~4세기 백제마을이 발굴되었다. 신봉동백제고분군과는 구릉지로 바로 접해 있고 정북동토성과는 무심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미호천을 함께 공유하며 인접해 있는 송절동 백제마을과 신봉동고분군 정북동토성은 위치에서나 시대적으로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음이 분명하면서도 개별 유적으로 보면 모두 불가사의하다. 문헌에 보이는 어느 고대국가의 수도는 아니었지만 청주는 뭔가 특별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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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임 2015-11-20 15:35:30
정북통토성에 청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을 것 같은데, 문헌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니, 아쉽군요. 좋은 글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