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물길의 중심지 가흥창과 목계나루
남한강 물길의 중심지 가흥창과 목계나루
  • 김명철<청주 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5.11.1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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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조선시대 지방에서 거둔 세금을 서울로 수송하는 제도를 조운제도(다른 이름으로는 ‘운조’, ‘조전’)라고 한다. 조선시대는 도로가 발달하지 못하여 육지 교통이 불편하였다. 때문에 전국의 중요 강가에 곡식과 포백(布帛)을 보관하는 창고(조창)를 만들어 세금을 모았다가 배를 이용하여 서울로 이송하였던 것이다.

육로를 이용하는 육운(陸運)도 있었으나 도로와 운송수단의 문제로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 일시에 많은 분량의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수송하는 데에는 육운보다 조운에 의존하는 것이 적합하였다. 국가에서는 군현의 관할 창고에 조세미를 모으고 선박을 창고에 부속 상비시켜서 매년 일정한 기한을 정하여 서울의 경창에 수송하였다. 조운에 대한 첫 기록은 고려 때 나타나지만 신라 때에도 조운이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조운에 대한 규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충주 가흥초 위쪽으로 조창인 가흥창이 있었다. 그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다리가 보이는데 다리 건너편이 신경림의 시로 유명해진 목계나루이다. 이곳도 수로 교통이 발달했을 때에는 가흥창의 배후도시로서 무척이나 번화하였던 곳이다. 남한강 뱃길을 통해 목재와 숯 등이 한양으로 운송되고 소금과 어물 등이 뱃길을 통해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또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조운선을 통해 경상도나 충청도 고을에서 세금으로 낸 곡식이 한양으로 운반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영춘에서 서울까지는 닷새 반, 단양에서 닷새, 충주에서 나흘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의 뱃사공들에 의하면 영월에서 서울까지는 평상시 6~8일, 물이 많을 때는 이틀 정도, 단양에서는 하루 반, 충주에서는 당일에 한양까지 닿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로써는 아주 빠른 교통수단이었는데 오늘날의 고속도로이고 고속철도였던 셈이다.

현재 가흥창의 건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시대 전국의 조창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었다. 한 해 동안 한양에서 가흥창까지 운항하였던 배가 800척을 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한양에서 소금이나 어물 그리고 여러 가지 잡화 물자를 실은 배가 강을 따라 올라와 나루에 정박하면 장사꾼들이 몰려와 큰 시장이 형성되고 이곳을 중심으로 내륙지방까지 물자가 교류되었다. 나루가 오늘날의 역이나 터미널이 되는 셈이었다. 특히 목계나루는 조선시대 5대 나루터로서 전성기에는 800호 정도의 큰 마을을 이루었고 100여 척의 상선이 집결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옛날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1985년에 건설된 충주댐으로 인해 형성된 인근의 탄금호 일원에는 국제조정경기장이 만들어져 있다. 지난해 아시아경기대회와 올해에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조정경기장으로 성공적으로 행사를 치렀고 내년에는 브라질 리우데자이네루 올림픽 아시아 예선전이 열린다고 한다.

탄금호 주변에는 명승 제42호로 지정된 탄금대와 국보 제6호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제205호로 지정된 충주 고구려비 등이 있다. 이번 주말에는 좋은 사람들과 가을 단풍이 물결 위로 아름답게 펼쳐진 남한강으로 역사문화 답사를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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