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통
우체통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5.11.1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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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아침에 나가면서 버스 정거장 옆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다. 엽서도 있었고, 편지도 있었다. 당연한 것이지만 엽서는 사람들과 함께 즐길 만한 그림이 있으면 좋고, 편지는 개인사생활이 들어가서 솔직해 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편지는 오랜만에 제자가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고, 엽서는 그림이나 즐기라는 군대 위문엽서였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 때는 위문엽서 쓰는 것이 일이었다. ‘군인아저씨께! 고맙습니다. 우리는 덕분에 잘 자요.’ 상투적인 문구였다. 고등학교 때였다. 맘을 고쳐먹고 중학교 시절 봄부터 국화를 키워 전교 복도에 깔아놓은 이야기를 썼더니 이게 웬일. 답장이 온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은 교직생활 처음으로 남학교로 답장이 왔다며 웃으면서 건네주었다.

내 기억으로는 국문과 4학년 때 입대해서 이제 제대를 얼마 남지 않은 군인이었다. 지금 보면 어리기 짝이 없는 청년이었겠지만 그때는 병장이라는 표현 때문에 제법 늙수그레하다는 추측을 했었다. 뭐라고 할까. 떠꺼머리총각이라고나 할까.

점심시간마다 청소를 해야 했는데 각종 기계와 공구가 있던 이른바 ‘공작실’(工作室) 당번이 되면서 남쪽 조그마한 화단에서 국화를 기르는 일을 맡게 되었다. 아무 것도 없는 데에다 물을 줘야 했지만 어느 순간 싹이 텄고 그러다가는 꽃이 폈다. 내가 한 일은 물을 준 일, 그리고 꽃망울을 한 두 개만 남겨두고 떼버린 일이 전부다. 공작실은 감독 선생님이 없었고 나는 자유롭게 근처의 평행봉을 즐기며 좋은 햇볕을 등 뒤로 하고 날마다 물을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가을이 오니 꽃이 피다니!

작은 엽서에 어떻게 1년의 과정을 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신기하고 기뻤던 이야기를 담았다. 내가 키운 꽃이 피는 것도 신기했고 그것을 화분에 옮겨 나무 복도 가운데 일렬로 늘어놓았던 것도 기뻤다. 아무것도 없던 것에서 노란 꽃을 만들어 복도를 환하게 만드는 일은 정말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과장하면 나는 그때 신이었다. 창조의 신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게 답장해준 그 사람이 참 궁금했다. 제대 말년이라 아무리 할 일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성실하게 답장한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대학으로 돌아갈 일을 기대하면서 고등학생과 어떤 의미에서든지 공감하는 젊은 군인아저씨였다.

우리 동네 우체통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띄게 빨갛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내가 편지를 넣는 것을 보면서 ‘아니, 여기 우체통이 있었어?’라고 아들은 되물었다. 우체통이 있지만 우체부-집배원이 걷어 가리라는 확신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마도 죽은 우체통일거야. 안 걷어갈지도 몰라. 그래서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에 편지를 넣어야 해.’ 그러나 그 우체통의 편지는 잘 가고 있었다.

우편 업무는 우정국(郵政局)이라고도 불리듯이 정치적 권력을 밑받침하여 성립한다. 아무나 주소를 만들어서 대문에 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폐 뒤에 정부의 권력이 숨어있어 종이쪼가리로 고기와 술을 살 수 있는 원리와도 비슷하다. 그래서 우편업무는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에 속한다. 아무리 시골우체통이라도, 그 속 한 통의 편지라도 국가는 그것을 책임질 의무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것은 국가에 대한 시민의 권리를 확인하는 것과 같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빨간 우체통이 있는지.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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