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가을 중간이 없다
극단의 가을 중간이 없다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5.11.15 1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월요단상
▲ 정규호

늦가을 가뭄은 은유적 고통이다. 인공의 댐으로 물길을 막은 거대한 저수지조차 바닥을 드러내고, 지하수마저 말라버려 지구에 더 깊은 구멍을 뚫어내야 하는 수난에도 늦가을 가뭄에 대한 두려움은 아직 멀다.

한여름처럼 이글거리는 햇살도 없고, 그러므로 바싹 메말라 쩍쩍 갈라진 논바닥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 가뭄은 실감이 쉽지 않다. 게다가 제대로 쓸 수 없을 지라도 4대강의 물은 그나마 남아 있으니 늦가을 가뭄이 두려움이라는 이미지는 실패다.

나는 2주에 한번 <월요단상>이라는 타이틀로 글을 쓴다. 매주 써오던 것에 비해 차례의 기다림이 길어지면서 오히려 갈팡질팡함이 늘어났다. 세월의 하 수상함이 갈수록 요동치고, 세상인심의 속도와 깊이, 무게 또한 격변의 극단으로만 치달으니 당초 생각 그대로 글을 쓰기가 쉽지 않다.

11월로 접어들면서 나는 ‘낙엽마다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줄 미쳐 몰랐다. 노란 은행잎은 지구의 화석이라는 별명답게 바닥에 나뒹굴어도 부스러짐이 덜하다. 반면에 갈색으로 초라한 느티나무는 메마름의 정도가 훨씬 심해 밟으면 쉽게 조각이 깨지고 소리 또한 요란하다.’는 식으로 다분히 서정적이면서 감성적인 <가을 단상>을 쓸 수 있겠다 했다.

그러면서 긴 가을 가뭄이, 그 서서히 메말라감이 반드시 오고야 말 내년 봄의 찬란한 빛깔을 빼앗을 수 있다는 한탄을 할 생각이었다. 거기에는 논밭의 작물이 타들어감도 그리하여 먹거리의 줄어듦에 대한 우려는 빠질 터인데 눈앞의 것만 보는 이미지의 한계와 상상력의 부재가 지연현상으로도 나타나 우리를 경계한다는 식으로 담담하게 그리고 흥분하지 않으며 가을을 공감하고 싶었다.

아! 그러나 세상은 도대체 물을 머금고 있는 것인지 아님 바싹 메말라 있는 상태인지 만져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스펀지와 같아서 오히려 보이는 것을 믿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막무가내 믿으려 하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니 ….

어쩌면 우리는 이미 ‘빼앗겨도 마침내 올’ 봄이거나, 꽃들과 잎들이 앞 다퉈 제각각의 빛깔을 뽐내며 길고 칙칙한 겨울을 위로하는 가을 같은 중간을 상실하고 있다.

13일의 금요일 지구촌을 공포로 뒤덮은 프랑스 파리의 테러, 7년만에 또 다시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과 맞선 물대포와 차벽, 그리고 떨리는 수능 수험생에 이르기 까지 도대체 위태롭지 않은 것을 찾기 어려운 극단의 이미지에 완충지대는 없다.

그리고 그 극단의 대립에 휩쓸려 존재가치를 상실한 중간의 서러움처럼 ‘낙엽 지거든 물어 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도 가을과 함께 사라지고 만 계절에서 우리는 서럽다.

인간의 생명을 인간 스스로 위협하는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테러는 인류 공통의 노력을 통해 반드시 멸종시켜야 한다.

하물며 자유·평등·박애로 상징되는 프랑스, 그것도 특히 인간의 여유 공간으로 대표되는 공연장과 축구경기장을 표적으로 하는 극단의 테러는 스스로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

따지고 보면 모두가 허상이다. 이슬람으로 지목되는 종교도,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시도이거나 노동의 조건은 물론 궁극적인 자유에 이르기까지 죄다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왜곡과 굴절이 아니던가.

늦가을 긴 가뭄은 이미지를 경계한다. 낮은 곳의 나뭇잎. 눈 들어 쪽빛 하늘. 그 중간에 야위어 가는 나무들의 빈 손. 지켜보아라. 세상은 아름답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