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름다운 날에
이 아름다운 날에
  • 김태종 <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5.11.12 1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時 論
▲ 김태종 <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눈을 열고 보면 어느 한 날이 아름답지 않을까마는 특히 이 계절은 그윽한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참 좋은 때인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오늘 아침나절은 하늘이 잿빛이었는데 그 회색 하늘과 노랑 빨강 단풍이 얼마나 멋지게 어울리는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눈시울이 젖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오후엔 바람이 약간 부는데 제 할 일을 다 한 나뭇잎을 그 바람이 떨어뜨리고 그렇게 떨어진 나뭇잎들이 다시 그 부는 바람에 이리 쏠리고 저리 밀리는 것까지도 혼자 보기에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날이 더욱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이 그윽한 풍경을 함께 누릴 줄 아는 이들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말을 나누거나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있거나 그 자체로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굳이 음악이 거기 있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인데 제 한 해 삶을 온전히 다 산 갈대와 억새의 꽃이 흔들리는 것이 그대로 춤이니 음악은 바람이면 넉넉하지 않겠는가 싶은 까닭입니다.

청소년기를 막 지나 청년기로 접어들던 무렵의 나는 산에 거의 미쳐 있었습니다. 산에 가는 데는 밤낮도 가리지 않았고 요즘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산행을 한 일도 적지 않습니다. 언젠가 산을 좋아하는 이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무슨 만화 같은 소릴 하느냐고, 아무도 그렇게 산 다닌 이야기를 믿지 않을 터이니 다시는 하지 말라고 정색을 하고 주는 충고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의 어느 해 이맘때의 일입니다. 곧 비나 눈이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잿빛으로 잔뜩 가라앉아 있었는데 까닭도 없이 헛헛해진 가슴을 가눌 길이 없어 그냥 가까운 산에 올랐습니다. 산길을 걷기도 하고, 능선을 타기도 하고, 길이 좀 괜찮은 내리막에서는 내닫기도 하다 보니 어느새 해거름이 되었고, 온몸은 땀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만난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손질이 잘된 무덤을 발견했고, 무덤의 정갈한 잔디밭에 올라서서 땀으로 흥건해진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습니다. 다 벗었을 때 온몸을 쓸고 지나가는 선뜩한 가을 기운의 상쾌함을 느끼며 그대로 지친 몸을 잔디밭에 뉘었습니다.

까실까실하게 살갗을 자극하는 잔디의 마른 잎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 하늘을 보고 있을 때 눈에 들어온 붉나무의 단풍,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오게 한 놀라운 아름다움이 거기 있었습니다. 붉나무는 제 몸을 키우던 잎사귀를 다 잃고 맨 꼭대기에 잎 하나를 달고 있었는데 그 단풍의 색깔이 흠잡을 데 없는 빨강이었습니다.

그리고 빨간 단풍 하나를 담고 있던 하늘, 회색과 빨강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온몸으로 확인하던 그 기쁨이 쉰 해가 가까이 되던 세월 저 건너의 일인데 마치 어제 본 듯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각의 한 축으로 작용하며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몸 식고 해 저물어 일어나 옷을 입고 천천히 내려오던 길마저도 온통 아름다워 보인 것은 아마도 그 풍경에서 이어진 길이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지금은 그 길이 남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가슴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그때의 기억을 오늘 다시 곱씹는 것은 그것이 내게는 큰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구름이 드리우거든 가까운 산에 한 번 가 보십시오. 누가 압니까. 예전과 달리 요즘은 가까운 곳에도 붉나무가 훨씬 많으니 단풍을 만날 확률이 그만큼 크고 그러면 내가 왜 이런 글을 썼는지를 풍경에서 눈으로, 눈에서 가슴으로 확인하며 그때의 나처럼, 아니 보다 더 크게 기뻐할지도 모를 일이니 말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 풀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