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 먹어라
엿 먹어라
  • 김기원 <편집위원·청주대 겸임교수>
  • 승인 2015.11.1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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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 김기원

엿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가공식품입니다.

곡식으로 밥을 지어 엿기름으로 삭힌 뒤 겻불로 밥이 물처럼 되도록 끓이고, 그것을 자루에 넣어 짜낸 다음 진득진득해질 때까지 고아 만든 달고 끈적끈적한 음식이 바로 엿입니다.

재료에 따라 쌀엿, 좁쌀엿, 수수엿, 깨엿, 밤엿, 잣엿, 콩엿, 고구마엿, 무엿, 호박엿, 대추엿, 꿩엿 등이 있고요. 강원도 옥수수엿, 울릉도 호박엿, 무안 고구마엿, 담양 창평쌀엿, 제주도 꿩엿 등이 유명세를 탄 지역 특산 엿들이지요.

아무튼 농경시대 최고의 인기 식품으로, 엿가래를 부러뜨려서 그 속의 구멍의 수효와 크기를 비교하여 승패를 겨루던 엿치기놀이도 있었으니, 엿은 음식이자 문화였습니다.

입시 철이 되면 학부모들이 엿처럼 시험에 딱 붙으라고 자녀에게 엿을 먹였고, 시험장 교문에다 엿을 붙여놓고 합격을 기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엿이 휴대가 간편하고 예쁜 포장까지 한 사탕과 과자에 밀려 뒷방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향수식품으로 명맥만 겨우 유지한 채 현대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치사한 욕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어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남을 은근히 골탕먹이거나 속여 넘길 때 대놓고 ‘엿 먹어라’ 하고, 남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해코지할 때 ‘엿 먹인다’고 합니다.

어원의 일설은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이야기입니다. 지난 1964년 12월 7일에 치러진 1965학년도 전기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① 디아스타아제 ② 꿀 ③ 녹말 ④ 무즙’ 중에서 택일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당시 정답은 ①번 디아스타아제였는데 ④번 무즙도 답이 된다는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무즙에도 디아스타아제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무즙이라 답해 한 문제 차이로 떨어진 학생의 학부모들이 떼로 항의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급기야 무로 엿을 만들어 입시와 관련된 기관에 찾아가 들이댔습니다.

‘엿 먹어라! 이게 무로 쑨 엿이다. 빨리 나와 엿 먹어라! 무즙으로 쑨 엿 맛이 얼마나 맛있고 달콤한지 정부는 아느냐, 엿 먹어라!’라며 무즙으로 만든 엿을 먹어보라고 고함을 치며 시위를 벌였죠. 결국 ④번 무즙도 정답으로 인정하고 추가 합격시킨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게 ‘엿 먹어라’라는 욕의 효시가 되었다는 설이 정설처럼 회자하고 있으나, 그전에도 ‘엿 먹어라’는 욕이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어서 어문학계의 면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아무튼 요즘 사람들이 엿은 잘 안 먹으면서 괜한 사람 엿을 먹이고, 걸핏하면 엿 먹어라 삿대질을 해댑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조직과 집단 간에도 서로 엿을 먹입니다. 틈만 나면 야당은 여당을 엿 먹이고, 여당도 이에 질세라 야당을 엿 먹입니다.

역사교과서 문제도 그렇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제쳐놓고 형식논리에 매몰돼 보수와 진보, 좌와 우가 반대를 위한 반대의 엿을 사생결단하듯 먹이고 있습니다. 칭찬하고 사랑하고 살아도 백년도 못사는 삶인데, 엿을 못 먹여서 안달입니다.

내가 남에게 엿 먹이면 남도 나를 엿 먹입니다. 그러니 엿 먹이지 맙시다. 서로 역지사지하며 삽시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사는 삶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오늘은 수능시험일입니다. 이른 아침에 마음으로 빚은 사랑의 엿을 고생한 수험생과 학부모님께 보냅니다. 모두 엿 먹고 소망하는 대학에 합격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길 축원합니다.

내친김에 선량한 사람을 괴롭히는 저질 인간들과 사회에 해악을 까치는 못된 무리에게도 엿을 보냅니다. 개과천선하라고 엿을 먹입니다. ‘이놈들 엿 먹어라’

/편집위원·청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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