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객의 수작 그리고 재치
취객의 수작 그리고 재치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11.0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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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유구한 세월을 겪다 보면 간혹 언어가 본의에서 크게 벗어나 이미지가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예 중 하나가 수작(酬酌)이라는 말일 것이다. 술을 주고받는다는 뜻의 이 말은 결코 나쁜 이미지의 말이 아니었지만 어느 시점부터인지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추파를 던진다는 의미의 나쁜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다.

아무래도 흐트러지기 쉬운 술자리에서 자주 일어나긴 하지만 맨정신에도 수작(酬酌)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술자리에서 술시중을 드는 일을 했던 기생(妓生)이라면 수작(酬酌)은 늘 맞닥뜨리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기생들이 지체 높은 손님들의 수작(酬酌)에 대응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의 기생이었던 이매창(李梅窓)은 수작(酬酌)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였는데 그 요체는 바로 재치이다.


취한 손님에게(贈醉客)


醉客執衫(취객집나삼) : 비단옷 휘어잡은 취객이여

衫隨手裂(나삼수수열) : 내 비단옷, 따라오는 손길에 찢기었소

不惜衫裂(불석나삼열) : 비단옷 찢어진 것 아깝지 않지만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 정도 끊어질까 두려습니다




기생 신분이었던 시인은 벼슬아치들과 술자리에서 어울리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술 취한 손님들을 상대하는 일이 다반사였을 테고 개중에는 술김에 수작(酬酌)을 걸어오는 손님도 있었다. 주도에도 어긋나고 예의에도 벗어난 불쾌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기생 신분으로서 정색을 하고 직설적으로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시로써 넌지시 거절하는 방법이었던 셈이다. 지체 높은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시인은 비단 적삼을 곱게 차려입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술에 취한 손님이 그만 그 귀한 옷을 손으로 움켜잡고 끌어당기는 일이 발생하였다. 얼마나 심하게 잡아당겼던지 적삼이 그만 찢어지고 말았다.

이쯤 되면 아무리 기생으로 신분상의 제약이 있다고 해도 화를 낼 법하지만 시인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점잖고 학식 있는 사람을 대하듯 하였다. 우선 옷이 찢어진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분위기를 잡은 다음, 그다음 말이 걸작이다.

옷이 찢겨 나가듯이 마음속의 정도 끊어질 것이 두렵다고 한 것이다. 정이 떨어지는 모습을 절묘하게 찢어진 옷을 통해 형상화한 표현수법도 탁월하지만 그것보다 더 탁월한 것은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손님에게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여유만만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실은 귀한 적삼을 잡아끌어 찢은 것을 힐난한 것이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얼핏 힐난으로 들리지 않는다. 도리어 은근히 속으로 좋아하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소리로 들린다. 참으로 뛰어난 재치가 아닐 수 없다.

술에 취한 사람이 수작을 걸어오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이럴 때 직설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은 자칫 시비를 부르고 더 큰 봉변을 만나는 빌미가 되기 십상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자제력과 재치이다. 힐난은 하면서도 상대가 그것을 언짢게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재치 있는 시구 하나는 수작(酬酌)을 퇴치하는 강력한 무기인 셈이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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