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고향 마을에는
늦가을 고향 마을에는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11.0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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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 이수안

가을 속으로 달린다.

야트막한 산에는 단풍 잔치가 파하지 않았는데, 들녘은 벌써 텅 비었다.

공룡 알 같은 볏짚 사일리지만 드문드문 들을 지킬 뿐, 금빛 나락의 물결이 만조를 이루던 들판은 어느새 쓸쓸한 풍경이다.

한참을 가다 보니 앞에 짚단을 실은 트럭이 천천히 가고 있다. 낫으로 벼 베기를 했는지 짚의 길이가 길쭉길쭉하다.

모든 작업이 기계화된 좋은 세월에 누가 손으로 벼를 베고 짚단을 묶었을까. 민속촌이나 드라마 세트장 같은 데서 초가지붕을 올리기 위해 수작업해서 싣고 가는 걸까.

초가지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내 기억은 먼 시공을 날아 고향의 늦가을 마당으로 간다.

가을걷이가 끝난 고향 마을은 이엉을 엮느라 온 동네가 부산했다. 추위가 오기 전에 일을 마쳐야 겨울을 따습게 나기 때문이다.

체구가 작은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에 비해 작은 손을 가지셨다. 그 작은 손으로도 아버지는 손끝이 야무져 짚일을 고루 다 잘하셨다.

가마니·망태기·멍석·짚 소쿠리 등을 마치 기계 작업한 것처럼 고르고 짱짱하게 만드셨는데, 이엉이나 용마름도 특히 매끈하게 잘 엮으셨다.

여름 내내 맹렬했던 햇볕도 아버지가 이엉을 엮는 늦가을 마당에서는 얌전히 내려앉아 한가로이 놀았다. 나도 언니·동생과 아버지 옆에서 지푸라기로 새끼를 꼬며 놀았다. 그것이 시들해지면 짚단 속을 헤집거나 아버지가 둘둘 말아 세워놓은 이엉 뭉치 사이를 드나들며 숨바꼭질을 했다. 지금도 아련하게 느껴지는 지푸라기 냄새와 바스락바스락 짚단 부대끼는 소리, 짚 먼지가 깔끄러웠을 법도 한데 우리는 뭐가 그리 신이 났던 걸까. 그런 날이 한동안 지나면 동네는 새 단장에 들어갔다.

이엉을 엮을 때는 따로 일했지만 이을 때는 여럿이 함께했다. 어른들은 이른 아침 지붕에 올라 무서리 내린 묵은 초가를 걷어냈다. 비에 상한 표면의 이엉을 걷어내면 속에는 비를 맞지 않아 새 이엉인 듯 깨끗한 이엉이 나온다. 그러면 어른들은 땅에서부터 긴 사다리와 지붕에까지 죽 늘어서 이엉을 올린다. 첫 번째 어깨에서 두 번째 어깨로, 다시 세 번째 어깨로…. 우리 몸체만 한 이엉이 사다리를 탄 어른의 어깨로 옮겨질 때면 그 위태로운 광경에 우리는 숨을 죽여야 했다. 조무래기들의 걱정과는 달리 어른들은 능숙한 솜씨로 집 한 채 옷을 뚝딱 갈아입혔다.

그렇게 초가가 옷을 갈아입으면 짚에 붙어있는 낟알을 먹으려고 참새들이 날아든다. 참새들의 만찬이 끝날 해 질 녘이면 새로 단장한 초가의 굴뚝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네를 에워싼 산이 동그랗고, 온 동네 지붕도 동그랗고, 그 지붕 아래에 사는 사람들 마음도 동그랗던 반세기 전의 고향 마을.

그때 촌민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한 건 마당에 근엄하게 자리 잡은 두쥐(짚으로 만든 벼 저장하는 창고) 덕분이었다.

일 년 농사지은 벼를 두쥐에 고이 모셔놓으면 생활비를 거기서 해결할 수 있었다. 벼 한 말 들고 나가 시장 봐 오고, 한 가마니 내면 학비를 거뜬히 마련했다.

오죽하면 마당에 큰 두쥐가 있는 집에는 묻지도 않고 딸을 준다는 말이 있었을까. 내가 지은 농사가 그 정도 대접받았으니 농사꾼의 자존감이 충족되고도 남았으리라.

순박한 미소를 짓던 그 시절 고향마을의 어른들, 그 얼굴 위로 이 시대의 지친 농부의 얼굴이 겹친다. 수입쌀에 밀려 천덕꾸러기가 된 벼를 갈아엎는 농부의 수심 가득한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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