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5.10.2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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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小品文
▲ 강대헌

멀쩡하던 정신이 돌연 혼미해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에 쏙 드는 펜(pen)을 만나게 될 때입니다.

모름지기 펜이라면 디자인이 남우세스럽지 않게 눈에 띄고, 글을 쓸 때 촉감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 장땡이겠죠.

문제는 호주머니 형편입니다. 웬만한 책값으로 쳐서 두 세권 아래면 저울질이 시작되곤 하는데 물질적 이해관계에 충실했던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로서의 모습은 이내 약해져서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게 됩니다. 지름신이 전광석화처럼 강림하는 것이죠.

더 큰 문제는 펜을 품 안에 넣어놓기만 하고 아예 꺼내 보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펜을 써야 한다는 목적을 상실한 채 그럭저럭 살아가고 마는 거죠.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펜을 사 놓기만 하고 쓰지 않는 식으로 몇 년이 지나고 나면 펜 속의 잉크가 굳거나 휘발돼 쓸모가 없게 됩니다. 엎친데 덮친다고 이런 일이 항다반사(恒茶飯事)로 버릇처럼 되어 버립니다.

어찌하겠습니까? 그야말로 돈은 돈대로 나가고, 써 놓은 글은 없고, 써지지 않는 펜들만 퀭하게 남겨져 있는 형국이 되는 겁니다. 이럴땐 바닷가에서 썰물때 속이 텅 빈 조개껍데기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하죠.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밥상을 받으면 맛있는 반찬에 먼저 손이 가지 않고 옷을 사도 곧바로 입지 않는 저의 따분한 방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펜 하면 떠오르는 몇 개의 한자(漢字)가 있습니다. 서(書)와 기(記)와 지(誌), 그리고 검(劍)입니다. 펜으로 글씨를 쓰게 하니 서(書)요, 말의 실마리를 정리하여 적게 하니 기(記)요, 기록한 것을 묶어낼 수 있게 하니 지(誌)요, 또한 “펜은 검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라는 말까지 있기도 하니 검(劍)인 것이지요.

스스로 다시 묻게 됩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천호차하인사(天乎此何人斯). “하늘이여, 대저 나는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라는 추사(秋史)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떠오르기도 하는군요.

이제부터라도, 아직 살아있는 펜들의 기지(機智)와 기개(氣槪)를 불러들여야만 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다시 쓰고, 다시 적고, 다시 묶어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날카로운 펜을 들고 온갖 썩어질 것과 맞지 않는 것과 구부러진 것에 맞서 싸울 용기를 내야만 하겠습니다.

기원전 5000년에 나무의 끝을 깎아 만들었다는 스타일러스(stylus) 이래로, 펜이 잠든 적은 아직 없으니까요.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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