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자를 논하다 - 매화(梅花)
사군자를 논하다 - 매화(梅花)
  • 윤승범 <시인>
  • 승인 2015.10.2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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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윤승범 <시인>

옛 어른들은 부지런하기도 하고 현명하기도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물을 보고 그것을 통해 삶의 지표를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올곧은 마음과 끝없는 경계(警戒)를 갖추고 살아야 온갖 사물이 내게 주는 가르침을 배울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보배우고 깨우쳐서 태어난 것이 사군자(四君子)입니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그 중에 매화가 으뜸인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매화는 작고 예쁜 꽃인데 한겨울을 나면서 꽃을 피웁니다. 꽃은 작고 여려서 저 어찌 혹한 눈 속에서 피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 여림을 보고 외유내강(外柔內剛)을 떠올렸습니다. 겉은 여리고 갸날퍼도 혹독한 시련을 겪어내는 그 당참. 며칠 굶은 고라니라도 뜯어 먹을 마음을 내지 못할 정도의 호리호리한 자태에 감춰진 당찬 정신을 사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날고 긴다는 조폭(組暴)들의 표상은 온몸에 새겨놓은 문신입니다. 싸움을 하기 전에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내 겉이 이렇게 무서운 것처럼 속도 무서우니 애초부터 덤빌 생각을 말라는 허세? 그러나 저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더없이 비굴해지는 외강내유(外剛內柔)의 허장성세가 매화에게는 없습니다.

곰곰 더 생각해보니 시련을 겪어내는 자세 또한 으뜸입니다. 내가 몸담고 사는 작은 소도시인 이곳에는 유난히 일용직 사무실이 많습니다. 많이도 보이는 인력 사무소에는 어두운 새벽부터 일거리를 찾느라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중년을 넘겼거나 노인 축에 끼는 연령들이 태반입니다. 그 힘든 일판에서 젊은이들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고된 막노동 일이라 몸에 익숙하지도 않을뿐더러 힘든 일 자체를 거부하는 젊은이들의 마음가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편의점 계산기를 두드리거나 PC방 모니터를 들여다 보는 아르바이트를 선호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심각하게 따질 필요가 있습니다.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을 더 뽑는 우리 한국 사회의 구조적, 착취 제도 때문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힘든 일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의 정신 세계도 분명 한 몫은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매화는 추운 겨울의 시련을 올곧게 이겨내고 꽃을 피워냅니다. 이겨내지 못하면 얼어 죽고 말았겠지요. 하지만 매화는 얼지 않고 죽지 않고 꽃을 피워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사군자 중에서 매화를 으뜸으로 친 모양입니다.

지나쳐 온 날들을 생각합니다. 나를 키운 것은 즐겁고 재미난 일들이 아니라 혹독한 시련들이었음을 깨우칩니다. 찢기고 핡퀴어지고 가슴이 저리도록 애통한 과거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냈습니다. 나름대로는 고통의 세월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밖에 못 온 것을 보니 얼마나 더 아프고 힘들어야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온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인데도 불구하고 이정도 밖에 못되는데 한 겨울 예뿐 꽃을 피워낸 매화의 고통은 얼마나 가열찼을까를 생각합니다.

매화가 이겨낸 긴 겨울에 찬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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