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잎 단풍 앞에서
포도잎 단풍 앞에서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10.2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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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 이수안

과수농사가 삶의 전부이다시피한 이곳 사람들은 지난 몇 계절을 옆 뒤 돌아볼 새 없이 숨차게 달려왔다.

동녘에 솟아오르는 해보다 훨씬 일찍 일터로 나가 어둠을 깨워 하루하루를 연 사람들. 이웃집 마실 같은 건 고사하고 잠도 줄여가며 일한 뒤에 마침내 휴식을 맞았다. 지금쯤은 한껏 게으름을 즐기는 정직한 행복이 집집이 머무르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아직 완전한 휴식에 들기 전이다. 떠나기 직전 잎새들의 고별축제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포도나무는 온통 노랑 또는 주황 옷으로 바꿔 입었다. 조만간에 져야하는 운명이지만 햇빛에 반사되어 투명하게 반짝이는 잎새, 잎새들….

마치 전등을 켠 듯 과수원을 환하게 밝힌 포도잎 단풍에 끌려 밭으로 든다.

포도밭 깊숙이 들어가자 큰 그림으로는 안보이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하게 물든 잎새들 속에 다문다문 보이는 상처입은 잎새. 벌레 때문에, 병균 때문에, 또 더러는 바람 때문에 입은 상처다.

상처입은 잎새로 양분을 충분히 합성하기는 어려웠을 터. 그렇다면 지난 계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상태의 잎들도 하나같이 번듯한 포도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답은 잎새들끼리, 더 크게는 가지들끼리 아낌없이 나눈 형제애에 있다.

포도나무 잎은 스스로 만든 양분을 움켜쥐지 않는다.

최소한의 양분만 소비하고 남는 것은 나무의 곳곳으로 보내준다. 뿌리로, 겨울눈으로 또 옆의 가지와 옆의 열매로….

그러기에 혹시 바람에 찢기거나 벌레가 먹어 일을 못하는 잎도 허둥대지 않는다. 형제 잎들이 자신이 만든 양분을 생색 없이 나누어주는 것이 자동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이런 형제들이 있다. 장정도 없으면서 하필이면 힘든 농사를 짓는 나는 형제들의 애정을 가장 많이 받는 못난이 잎새다. 게다가 공들여 키운 포도나무를 그렇게나 많이 잘라내고 복숭아나무를 심었으니 자나깨나 근심거리다.

내 안의 이유로 혹은 밖의 이유로 생긴 못난 모습은 나의 심사를 가끔 고단하게 한다.

내가 지쳐 있을 때면 형제들은 가만있지 못한다. 먼 길 달려와 일해주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김치와 밑반찬을 장만해 택배로 보낸다. 마음보다 계산이 앞서는 지금 세상에서 혈육만이 줄 수 있는 무한 응원이 아닐까.

심산유곡의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포도원 단풍이 이리도 아름다운 것은 화려하게 물든 고운 빛 때문만이 아니다. 나만 잘 살겠다는 욕심 없이 당연하게 나누는 형제애가 보이기 때문이다.

어기영차 서로 힘을 북돋워 가며 소명을 다한 것도 감동이거늘 노을빛보다 고운 빛의 고별축제까지 준비하다니. 찢긴 포도잎 단풍을 하나 들고 생각에 잠기는데 가만히 감동이 차오른다.

지난날의 삶이 순조롭지 못했던 나도 이제는 형제들의 기쁨이 되는 꿈을 꾼다. 언감생심일지언정 자신감도 생긴다. 가을이라는 계절 저 혼자 포도잎 단풍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지난 계절의 기쁨과 아픔이 뭉쳐져 만들어진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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