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귀비의 꿈으로 창건된 용화사
엄귀비의 꿈으로 창건된 용화사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 승인 2015.10.2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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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박상일 <역사학박사·청주대박물관>

1993년 10월 10일 청주시 문화재 담당자로부터 사직동 용화사로 급히 와달라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 보니 무심천제방에서 전신주 이설공사를 하던 중에 출토된 청동유물 수백 점이 햇볕이 쨍쨍한 도로변에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제방도로의 하천 쪽 경사면에서 전신주를 세우기 위한 구덩이를 파다가 청동유물이 무더기로 나오자 인부들이 시청에 신고하였고 담당자는 국고귀속 처리를 위해 국립청주박물관에 수차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받지를 않자 필자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유물들은 검은 개흙 범벅이 되어 뚜렷하지 않았지만, 청동항아리 향로 접시 등 진귀한 것들이었다. 수량도 엄청나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두 난감해하다가 결국 청주대 박물관에 임시보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 유물을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었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물들은 곧바로 매장문화재로 처리하여 청주박물관으로 이관되었고 후에 일부 유물에서 ‘사내사(思內寺)’ 또는 ‘사뇌사(思惱寺)’라 새긴 글씨가 판독되어 용화사 일원이 사뇌사 터로 확인되었다. 사뇌사 유물들은 청주의 불교문화를 이해하고 고려시대 금속공예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로서 현재 청주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뇌사는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이 하안거(夏安居)하였을 만큼 고려시대 선종사원으로서의 위상이 높았던 사찰이었지만 고려말에 외침을 받아 황급히 피난을 가면서 절의 중요한 집기들을 퇴장(退藏)하고 절은 폐허가 되었다. 이후 사뇌사 터는 오백여 년 동안 수풀만 무성하다가 1902년에 용화사로 재탄생했다.

용화사 사적에 의하면 대한제국 광무 6년(1902)에 엄귀비(嚴貴妃)의 명을 받아 청주군수 이희복(李熙復)이 상당산성 보국사(輔國寺)를 옮겨 창건했다. 고종황제의 엄귀비가 어느 날 궁중에서 좋은 꿈을 꾸는데 일곱 부처가 찾아와 청주에 절을 지어달라고 청하므로 이를 이상하게 생각해 사람을 보내어 찾도록 하니 과연 황막한 수풀에 7구의 석불이 있는지라 법당에 안치하고 향불을 올렸다고 전한다. 엄귀비는 본래 상궁이었으나 명성왕후 시해 후 일본의 감시를 받고 있던 고종황제를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케 하는 아관파천을 성사시키는 등 고립무원의 고종을 극진히 보살핌으로써 총애를 입어 영친왕을 낳고 황귀비가 되었다. 국운회복을 위해 인재양성이 급선무라 판단하고 양정고등학교, 숙명여학교, 진명여학교를 개설한 여장부였다.

용화사 자리에는 사뇌사 외에 주변에 많은 절이 있었다. 운천동 사지와 흥덕사지를 발굴할 때 운천동 주민으로부터 마을 전설을 채록하였는데 어느 분은 자신의 선친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석불들을 용화사로 옮기는 일에 부역 나가서 엄청 고생했다고 했다. 어느 석불은 늪 가에 엎어져 있어 낚시꾼들이 걸터앉아 낚시했고, 어떤 석불은 장육불로서 동학농민전쟁 때 거대한 불상 뒤에 숨어 관군의 총탄을 피했다고도 한다. 이런 구전들은 사직 운천동 일대에 방치되어 있던 거대한 석불들을 한 곳으로 모아 용화사를 창건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용화사는 1932년 불타버리자 청석학원 설립자인 김원근이 옛 충청도병마절도사의 집무실이었던 선화당을 매입해 옮겨짓고 법당으로 사용했지만 6·25때 다시 전소하여 7석 불이 노천에 서 있기도 했는데 그 모습이 장엄하여 우편엽서에도 많이 찍히었다. 이 불상들은 칠존미륵불로 불리기도 했으나 본래 각각 조성된 것이므로 문화재 명칭은 용화사 석불상군이라 하여 보물 제985호로 지정되었다. 흥덕사 사뇌사 용두사와 함께 고려시대 청주의 문화상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불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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