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역사와 전통이 흐르는 충주 남산성
신라 천년의 역사와 전통이 흐르는 충주 남산성
  • 김명철 <청주서경중학교 교감>
  • 승인 2015.10.21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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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신라는 우여곡절 끝에 꿈에도 그리던 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인구와 영토가 2배 이상으로 늘어난 통일 왕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들을 수립하게 되는데, 가장 시급하고도 대표적인 방책이 바로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늘어난 국토와 백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9주5소경 제도를 시행하였다. 충주는 신라의 5개 작은 수도(소경) 가운데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국원경’으로 승격되면서, 지방 행정과 군사의 중심이 되었고,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충주는 달천과 남한강이 흐르고 높은 산으로 빙 둘러 싸여 있는 분지 지형으로 사람 살기에 좋은 여러 가지 여건을 잘 갖추고 있다. 하늘재, 조령, 죽령 등의 고갯길로 이어지는 큰길과 강을 따라 서울과 바다로 이어지는 뱃길의 중심지였다. 일찍이 전략적 중심지로 백제,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장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정치 문화적인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는 등 역사의 숨결이 거칠게 이어졌던 지역이다.

국난의 시기에 온 백성들이 힘을 모아 어려움을 극복한 흔적은 성곽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유럽의 귀족과 영주 개인을 위한 ‘캐슬’이 아니라 온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던 ‘포트리스’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고을에서 평지성과 산성의 세트형태로 나타난다. 한성에 남한산성, 북한산성이 세트형태로 나타나듯이, 청주에 청주읍성과 상당산성처럼, 충주 역시 충주 읍성과 충주 남산성이 세트 형태로 존재한다.

남산성은 신라의 국력이 강해지기 시작한 5세기 후반에서부터 6세기 초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남산 꼭대기도 전체적인 남산의 생김처럼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등성이가 있는데 산 정상부터 급한 경사를 따라 둘레 1145m, 높이 7~8m로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산성에는 동서남북으로 성문이 있었으며, 성안에는 우물터와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가 있었다. 산의 정상부만을 감싸면서 쌓은 성이지만 경사진 성안에도 건물이 있었는데,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 편 및 기와 쪽이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군사적인 시설물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다른 성에 비해 원래의 성벽이 잘 남아있는데 석재를 고루 쌓는 축성 방법을 취하고 있다. 또 성 안쪽에는 성벽의 안쪽을 따라 빗물이 낮은 위치로 흘러갈 수 있도록 배수로도 갖추어져 있다. 계곡을 통과하는 성벽은 바깥 아래쪽에 성의 기초가 되는 기단을 보강한 축대가 있어서 신라의 특징적인 성을 쌓는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새로 복원하고 있는 성벽은 이러한 신라의 축성방법이 반영되지 않아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온 유물들은 대부분 신라계의 것들로 6~7세기의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신라의 국원소경과 관련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충주는 경주와 서울 다음으로 많은 역사적인 문화유적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시대도 다양하고 이곳을 거쳐 간 나라도 많기 때문이다. 특별히 충주 남산성에 올라서면 충주의 문화가 왜 그리도 다양하게 존재하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충주는 발길 닿는 곳에 역사가 숨 쉬고 손길 닿는 곳에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역사와 전통이 살아서 숨 쉬는 충성스런(忠) 고장(州)이다. 삼국통일의 중심이었던 충주가 통일한국의 중심지로 우뚝 서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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